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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밤을 펼치면, 검은색 페이지마다 빛나는 말줄임표가 박혀 있었다. 사람들은 밤하늘을 한 장씩 넘기며 손끝을 베었다. 얇은 상처로 어떻게 세상을 감각할 수 있을까. 사랑은 동일성이라는 미신 앞에서 눈을 감는 일이다. 그런 류의 희망은 건너 편 미래에서 불어오는 바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가장 작은 바람의 이름은 한숨이었다. 모든 사물은 후- 불기만 해도 지구 한 바퀴를 돌았다. 그러나 돌아올 때 반드시 원래의 자리를 조금씩 비켜나간다. 사물의 질서를 기록하는 것은 그림자의 몫이었으나, 밤은 모든 질서를 소거한다.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였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과 같다. 그러나 미시 세계의 역사는 마침표보다도 작은 미시 세계의 키보드로 기록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만약 역사에 수정이 가능하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 예술을 시작하고 포기했을까. 이러한 물음이 촌스럽다고 말하는 이들을 위하여 차라리 군홧발에 으깨지지 않는 역사가 필요하다. 원자폭탄으로도 터지지 않을 튼튼한 역사가 필요하다. 대게 그런 역사는, 세상의 모든 비밀번호로 만든 비밀번호만큼 조심스럽다. 그 중의 쉼표 하나보다도 조용하다. 나의 할머니는 일제시대에도, 6·25 에도 같은 집에 살며 도망가지 않았다고 했다. 그 정도의 작은 역사라서 부서지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때론 ‘혁명’같은 단어가 추상회화 같다고 생각했다. 어둠을 구분하기 위해선 배율보다 해상도가 중요하지 않았을까.
도판을 해설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역사는 동일한 외연의 반복이다.’
‘오직 반복만이 진리를 도출한다.’
‘진리는 효율성에 의거하여 선별적으로 운용된다.’
살아있는 것은 무엇이든, 일정 기간 이후 다른 무언가로 재정의된다.
나는 미신에 관대한 편이며, 따라서 현명한 사람이 되지 못했음을 후회한다.
10년 전 어느 밤을 펼치면, 검은색 페이지마다 빛나는 말줄임표가 박혀 있었다. 읽을수록 얇아지는 밤을 넘기며, 나는 손끝을 베었다. 체념은 작은 물방울로 이루어져 있다. 슬픔이란 때론, 몸에서 물을 짜내는 힘에 불과하다. 그러나 모두가 물에 젖은 밤엔 페이지가 찢기기도 한다. 젖은 페이지에는 손끝을 베이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 우리는 어제와 다르다.
습관이 겹치면 역사가 된다.
같은 책을 다시 읽지 않기로 결심했다.
2014년에 적은 미발표 글을 수정하여 2024년의 전시에 사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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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정지구 아카이브 작가 소개
이준용은 인식론적 관점에서 기억하고 있는 대상들을 한 장 혹은 여러 장에 걸쳐 조립하여 비선형적 내러티브를 만들며, 이미지를 도구 삼아 언어의 틈을 탐구한다. <귀여워도 소용없어, 2024>(배렴가옥), <너무 슬퍼서 말해줄 수 없어요, 2018>(소마 미술관) 등의 개인전을 열었고, 단체전 <유머랜드 주식회사.2021>(대구 미술관),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2017>(하이트 컬렉션) 등의 기획전에 참여했다
2024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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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프리뷰 작가 요청자료 수정
인식론적 관점에서 기억하고 있는 대상을 그린다. 여러 텍스트를 참조하여 인지한 대상을 추출하고, 이를 조합하여 일상적 사건의 이미지를 평면으로 구성한다. 이때 구현되는 대상은 직관적 인식을 위해 특수성이 제거된다. 가급적 인과관계와 합리성에 기반을 두되, 약간의 틈을 둔 채로 어긋나게 단일 레이어에 조립된다. 이를 통한 전형적 서사 획득을 목표로 하며, 동시에 선형적 이미지 읽기의 지연을 시도한다.
2024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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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워도 소용없어 (언어 없는 세계에서) 이준용 개인전
Cuteness is useless (In the language-less world)
2024. 7.27- 8.18 배렴가옥 창작실험실 입주 보고전
J: 최근에 올린 그림 잘 봤습니다. 귀엽더라고요
나: 감사합니다. 근데 귀여워도 (아직은) 소용없어요.
이번 전시의 가제였던 '너클볼 연습'과 미리 적어 둔 서문이 너무 재미없어서 고민하고 있던 차에, 최근 만난 친구 J와의 대화가 문득 떠올랐다. 귀여움에 대한 논의는 사회 전반의 각 분야에서 이미 널리 진행되어 왔으며, 나는 이것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이 전시에선 귀여움이 무엇인지 정의 하려는 게 아니다. 따라서 ‘귀여움이 승리한다.’, ‘귀여움이 세상을 구한다.’ 따위의 팬시한 주장을 하려는 것도 아님을 미리 밝힌다. ‘귀여움’은 현상이고 ‘소용없음’은 판단이다. 이 판단에 방점을 찍고, 그동안 지나온 과정에 대한 고민을 적어보려 한다.
질문 1 : 나는 왜 귀여운 그림을(그림을 귀엽게) 그렸을까, 그리고 왜 귀여운 건 소용없다고 대답한 걸까?
1.1. 그림이 귀엽다는 것 : 마주한 이미지에 대한 첫인상. 관람자의 미적 기준에 의해 일정 부분 평가 완료된 상태. 특별한 거부감 없이 관람자의 뇌에 이미지가 각인됨.
2.1 소용없음의 사전적 의미 : 특별한 쓸모나 가치가 없다는 뜻.
2.2. 소용없음의 문맥적 의미 : 귀여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세상에 너무도 많다. 그 수많은 이미지 속에서 내가 만든 이미지가 굳이 존재해야 할 그 타당성에 대해 아직 확신이 없음. 이것이 동시대 미술이 맞긴 한걸까?
2.3. 소용없음을 창작자의 관점에서 : 현재의 매체와 작업방식으론 인지도를 쌓는다거나, 판매 증진에 있어 큰 전환이 되지 않을 것을 예측하고 있다.
: 이렇게 정리해 보니, 소용없다는 판단에는 적어도 두 종류의 좌절감이 내포된 것으로 보인다. 이 두 가지 좌절감의 사례를 해결하면 이미지의 무책임한 귀여움도 그 자체로 수용이 가능하여, 별도의 부차적 의심 없이 미학적으로 판별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2.3의 경우, 종이 그림과 드로잉이라는 매체적 한계에 대한 푸념이기 때문에 본 글에서는 다루지 않겠다. 그러면 2.2에 대한 논의만 남게 된다.
애초에 이번 작업을 통해 내가 진행하고 싶었던 건, 지난 작업을 관통해 온 정서적 호소와의 단절이었다. 특히 내가 무슨 미술계의 최수종도 아니고, 사랑 타령만 줄곧 해대는 사랑꾼의 그림으로 한정되어 독해되는 상황이 혐오스러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별도의 형식적 고려 없이 다량의 아이디어를 A3 용지에 가볍게 소모함에 따른 소재 고갈과 의욕 상실을 극복하기 위해 고안해 낸 나름의 내러티브 작법을 정리하여, 전시의 형식으로 한 번 펼쳐 보는 것이었다 (다시 한번 거듭 말하지만, 자전적 성격의 드로잉은 학부 졸업과 함께 종결했다). 따라서 내가 말한 ‘소용없음’이란 전시를 위해 사전 설계된 태도가 아니라,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마주한 난관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질문 2: 그렇다면 어떻게 작업 전반에 엄습하는 ‘소용없음’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을까.
: 내가 생각하는 해결 방안은 다음과 같다.
1. 현재 작업의 위치를 인지하고, 앞으로 도달하고 싶은 지점에 대해 명기한다
2. 작업으로 획득하려 하는 사회적 함의에 대해 규명한다
우선 전반적인 작업 과정과 이를 통해 의도하는 것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본다.
작업 과정 : 나는 내가 기억하는 것을 그린다. 여기서 기억은 개인으로서의 단순 경험을 말하는 게 아니고 인식론의 관점에서 인지하고 있는 어떤 대상, 아직 개념적으로 정립되지 않은 표상에 대한 것이다. 머릿속 대상을 그린다는 것은, 눈앞에 보이는 것을 응시하고 조응하여 대상을 최선의 형식으로 끄집어내는 페인터의 태도와 일정 부분 대치된다. 나는 담아둔 대상들을 조합하여 일상적 순간이나 형태를 구성한다. 이때 대상의 특수성이 제거된 개념을 이미지화하여 단일 레이어로, 가급적 인과관계의 합리성에 기반을 두되 약간의 틈을 둔 채 조립한다. 이를 통한 직관적이며 전형적인 서사 획득을 목표로 하며, 동시에 선형적 이미지 읽기의 지연을 시도한다. 더 간단히 말한다면 나는, 콩트에 비견되는 짧은 서사를 한 이미지 안에, 혹은 여러 이미지 전반에 걸쳐 성립시키고, 그것을 관람자가 독해하는 과정에서의 멈춤과 이탈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작업의 목표 : 이 전시는 내가 '기억하는 대상'을 평면 이미지로 번역하는 과정에 대한 형식 연구이다. 기억에 진입한 대상은 언어적 구획의 가공과 정제 과정을 거치며 표상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나는 붓으로 언어를 덜어내는 페인터가 될 수 없다. 언어를 가장 합당한 방식의 이미지로 번역하여, '언어 없는 세계'로 송부한다. 페인터가 리무버라면, 내 경우엔 번역가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추구하는 것은 개념 미술이 아니며, 이미지의 본질은 여전히 비언어적 자유로움에 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를(언어적 속성을) 극복하기 위한 장치로 내러티브의 ‘틈’을 설계해 왔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을 통해서 나는 아래와 같은 질문을 다시 작성할 수 있다.
질문 3: 내러티브의 ‘틈’을 통해 교차하는 공동의 창문은 어떤 모양이며, 이 창문이 조망하는 곳은 어디인가
: 대상들이 서로 엮여 어떤 이야기가 되는 동시에 그것들이 조응하지 못하고 비문이 되는 순간을 비추려 한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질문 7로 넘기며, 현재까지 작업 된 이미지를 관통하는 몇 가지 사례를 추려본다.
- 인간 아닌 존재에 인간적 속성을 부여함
- 언어적 은유로 명명된 대상이나 동음이의어를 갖고 있는 대상을 이중으로 접붙임
- 측정할 수 있는 대상을 숫자나 각종 도량형에 맞추어 재구성
-(그림 밖) 더 큰 사건을 드러내기 위해 그림의 주가 되는 대상을 도려냄
-그림의 내부나 외부(제목)에서 텍스트의 개입을 통하여 전형성을 무력화
- 이것들을 일상적 삶의 양태를 본떠 다소 연극적으로 재배치
질문 4 : 어떤 표상을 선별하여 이미지화하는가?
: 낱장 이미지들의 전체적인 연결구조 형성과 형식적 통일성을 부여하기 위해 일정 부분 자기 참조적인 대상 선택을 한다. 발자크의 인간극 시리즈에서 이전 작품에서 등장하던 인물이 다른 작품에 재등장하며 소설책에 적히지 않은 세계에 대해 암시한다. 나는 이를 응용하여 마찬가지로, 한 개의 이미지로 종료되는 세계가 아닌, 메타적 관점에서의 이미지 제작을 통해 부단히 확장되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생성하려 한다. 이를 위해 이전 작업을 종합하여 X, Y, Z축을 설정하고 여기서 추출한 요소를 조합하여 다음 장의 그림을 만든다.
질문 5: 근데 그걸 굳이 귀엽게 그린 이유가 뭔가?
5.1 : ‘귀여워도 소용없어1’이라는 그림의 원래 제목은 ‘강아지풀을 핥는 강아지들’이었다. 처음엔 회사 현관 앞 잡초밭에 피어있는 강아지풀이 그냥 귀여워서 그림으로 옮겼다. 풀만 그리자니 심심해서 다른 요소를 넣었다. 강아지풀이 영어로는 'foxtail'이다. 단어가 막 생성되던 그 오랜 옛날에도, 인종과 언어권을 불문하고 사람들이 그 풀을 보고 다들 그저 귀여운 동물의 꼬리를 생각했다는 것이 천진하게 느껴졌다. 애초에 귀엽게 느낀 대상을 귀엽게 그리는 건 과정상 큰 의문이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그 의문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이 바로 ‘소용없음’을 느꼈던 첫 번째 이유이다.
소용없음 1: 의심 없이 제작된 미끄러운 이미지가 미술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 이 이미지가 키치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세밀한 전제가 필요하다. 예컨대, 작가가 대상의 미끄러움을 숙지하고 작업에 임하였는지, 대상이 그리기 자체를 위한 형식적 탐구의 도구에 불과한 것인지, 혹은 대상을 그리면서 궁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등등.
5.2 : 귀엽지 않은 대상을 귀엽게 그리는 전략에 대해선 약간의 설명이 더 필요하다. 귀엽다는 건 어떤 대상에 가시가 없는 것, 모서리가 없는 것, 완전무결하게 매끈한 것으로 생각한다. 호랑이가 사냥할 땐 무섭지만, 사파리의 비좁은 상자에 들어가 있는 모습을 보면 귀엽다. 그 흉악스러운 외모에서 불현듯 작은 고양이가 연상되기 때문이고, 여기엔 내가 대상으로부터 한없이 안전하다는 전제가 뒷받침 되어있다. 숭고미를 손바닥만 하게 축소해 동그랗게 만들면 귀여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여하튼 이런 의미에서 귀여움이란 관람자에게 더 쉽고 편리하게 다가가기 위한 그리기 전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조금이라도 사람들 마음에 더 쉽게 다가갈 그림을 그리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이러한 방식을 채택하지 않았나 싶다. <질문 2>에도 적어놨다시피, 나는 대상의 어떤 측면을 끄집어내는 ‘화가’의 입장보다는 대상을 대상으로 인식할 수 있게 만드는 ‘번역가’의 입장에 가까운 사람이다. 이것이 정확하게 인식될 수 있다면, 기왕이면 접근하기 편한 이미지로 만드는 게 여러모로 유리할 것으로 판단했다.
소용없음 2: 이 판단이 옳은 선택인지 ‘아직은’ 확신하지 못하겠다. 여기에서 판단이란, 이미지를 생산할 때의 '번역가의 태도'와 내가 선택한 '그리기 방식(형식)' 모두를 포괄한다.
질문 6: 소용없다고 하면서 그리기를 왜 멈추지 못하고 반복하는가
: 나는 그리기를 두 종류로 나누고 있다. 첫째는 말 그대로 종이 위에 안료를 안착시켜 어떤 색감과 형상을 드러내는 것. 두 번째는 한 장의 그림을 한 번의 붓 터치로 가정하는 메타적 관점에서의 그리기이다. 예를 들어, 화가가 임의의 얼룩과 임의의 붓질로 임의의 형태를 만든다. 이 붓질을 점진적으로 가다듬어 보다 더 뚜렷한 형태가 나오는 지점을 모색한다. 최종적으로 임의의 형태가 모든 사람들이 인지할 수 있는 대상으로 전환될 때 이 작업은 끝이 난다. 이 예시에서 화가가 던지는 한 번의 붓질이, 나에게 있어 한 장의 완결된 드로잉이라고 가정한다. 그림이 무의미한 사건으로 종결되지 않기 위한 조치로, 한 장의 드로잉에는 반드시 독립적으로 기능하는 내러티브가 존재해야 한다. 내가 (아직은) 소용없다고 느낀 또 다른 지점도 바로 이쯤이다.
소용 없음 3: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는 것을 확장된 세계라고 주장하기 위해선 합당한 논증(이 경우엔 이미지의 형태와 개수)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현재의 관점에서 내 주장은 일정 부분 비약이라고 볼 수도 있다. 어차피 지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산발적으로 추출된 이미지를 던져보고 그린 그림을 사진 찍어 아카이브 하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는 내가 그린 이미지가 위치하는 곳을 한눈에 조망할 수도 없고 이것들이 조합되어 완성이라 일컬을 수 있는 지점이 어디인지는 더더욱 알지 못한다. 선명한 천체를 관측하기 위해 대기권 바깥으로 우주 망원경을 쏘아 올려야 한다. 지금의 나는 작업을 바꿔보기 위해 노력 중이고, 그 방법의 하나로 일단은 지금까지 작업을 만들 때 가장 즐거웠던 부분을 아예 작업의 전부로 치환해 보기로 했다. 한편으론, 내가 흥미를 느끼던 부분이 사실은 가장 익숙해서 스트레스 받지 않았던 것, 즉 '대기권'과 같은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확신이 없다는 뜻이다. 작업이 좀 더 쌓여봐야 할 거 같다. 그래서 ‘아직은’이라는 부사를 덧붙였다.
소용 없음 4: 따라서 나는 전략적으로, 이미지를 생성하여 보다 많은 ‘붓질’의 사례를 제시하는 것에 집중을 해보려고 한다. 미술에서는 보통 그리기 형식에 대한 논의와 그것에 대한 가치 판단이 우선적으로 고려 되어왔다. 그러나 내 경우엔 이것을 후순위로 두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질문 7: 낱장의 그림들이 엮여 확장된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 조금 극단적인 사례이긴 하지만, 책상 위에서 바지 벗는 시늉을 했던 나훈아의 기자회견이 은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기자 회견은 해당 이슈에 대해 기자들을 모아놓고 해명하거나 시인을 하는 자리이다. 나훈아는 성기 절단 루머에 관해 이야기하던 중, 갑자기 책상을 박차고 올라 바지 지퍼를 살짝 내리고, ‘제가 내려서 5분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아니면 믿으시겠습니까?’라고 되물었다. 다섯 손가락을 쫙 펴고 벨트를 풀고 지퍼를 살짝 내린 채 사람들을 노려보고 서 있는 포즈 하나로, 발아래 빼곡하게 설치된 수많은 언론사의 마이크와 카메라를 제압한다. 일종의 퍼포먼스가 된 이 사건에서 나는, 말하기 위해 설계된 그 장소에서, 말이 아닌 제스처(이미지)로 수많은 눈과 귀를 단박에 잠재울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나는 이 장면을 꽤 여러 번 그렸고, 이 작업의 제목을 ‘나훈아’가 아니라 ‘나훈아 연습’이라고 지었다. (이 시리즈는 여건상 이번에는 전시되지 않는다.)
종말의 날 이후의 세상을 기술하는 아포칼립스라는 장르가 있듯이, 나는 언어라는 기호가 하루아침에 사라진 세계를 상상해 본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대상은 존재하되, 그것들이 엮이는 과정에서 삐걱거리며 온통 비문이 될 수밖에 없는 세상이다. 최초의 언어는 개인 간 소통을 위한 몇 가지 약속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더욱 체계적인 기호가 되고,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만 사고를 할 수 있다. 여기서 이미지는 본질적으로 언어가 없는 세계에 진입하기 위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언어를 통해 이미지를 만들고 그 이미지를 통해 다시 언어적 세계를 무력화하는 전략을 택한다. 이 과정은 무한히 축소되며, 재생산을 통해 다시 확장된다. 비문이 된 개체들은 가장자리에 실금을 남기며 재접합된다.
:언어(시작)-이미지(생산)-언어(파편)-이미지(봉합/재생산)...
(지금까지 적어본 이 질문의 과정들이, 어쩌면 제작되는 족족 표류하고 있는 이미지와 그 내부의 유격에 대한 설명, 혹은 창작 과정 전반에 퍼져있는 뿌연 안개를 헤쳐 나갈 길잡이로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이 글을 적는다. 다소 장황한 건 아닌가 하는 염려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이름이 어쨌든 ‘창작 실험실’이라는 것에 용기를 냈다. 사실 졸업 이후로 작업하는 날보다 쉬는 날이 많았다. 다른 직업을 염두에 두고 살았기 때문에, 그리기 쉬운 그림을 적당히 만들어왔다. 이 전시를 준비하며 나는, 내 작업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곳이 어디일지 처음으로 구체적인 목표 지점을 설정해 봤다. 짧은 준비 기간이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많은 작업을 할 수 있게 되어 기쁘고, 한편으론 사정상 전시하지 못한 그림이 많아 아쉽다. 다음 전시가 언제일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보다는 작업이 구축하는 세계의 윤곽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을거라 믿는다.)
2024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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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로잉 그로잉을 위한 100자 작업 소개
일상의 보편적 순간들을 구상 이미지로 만든다. 특수성이 제거된 표상을 단일 레이어로, 인과관계에 기반을 두되 약간의 틈을 둔 채로 조립한다. 이를 통한 직관적 서사 획득을 목표로 하며, 동시에 선형적 이미지 읽기의 미약한 지연을 시도한다.
2024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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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감사했습니다.
2024.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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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t-1 네 눈동자 속에 서 있던 못생긴 나 1
ugly me stood backward in your eyes
2023.10.21 - 2023.11.19 그블루 갤러리
오늘 연인과 만나 기쁘고, 헤어져서 괴로운 감정은 사실 전기 자극에 의한 편도체의 반응이라 합니다. 사랑이라 불리는 일련의 감정은 호르몬에 의해 조절되는 화학작용의 과정이며, 그 목적은 끊임없이 이성을 갈구하여 번식을 이뤄내는 것에 있습니다. 유물론자 또는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마음이란 것은 복잡다단한 신경계 물질적 반응의 종합일 뿐.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인간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혹자는 지나치게 냉소적이라 말할 것입니다. 이 경우 사람은 가축의 고깃덩어리와 다를 바 없습니다. 보이저 1호가 찍은, 지구라는 창백한 푸른 점 속 먼지보다도 덧없는 존재일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불가피하게 태어난 생존 기계이지만 이러한 사실을 매우 쉽게 외면, 혹은 망각하며 살아갑니다.
언어라는 생각 도구가 발명되고, 그저 종의 번식을 위해 DNA에 프로그래밍되어 발현되어 왔던 감정들은, 오늘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특정지어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야만 허무와 싸우며 살아갈 가치가 있기 때문일까요. 혹자는 이 ‘사랑’의 자리에 특정 종교 혹은 특정 신의 이름을 대입할지도 모릅니다. 여하튼 ‘사랑’이라는 사회적 함의는 인류의 사회문화적 변화의 과정을 거치며 보다 형이상학적 의미를 포괄하게 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사랑이란 감정을 예찬하는 까닭은, 그것이 역사적으로 ‘조건 없는 증여’를 미덕으로 전해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은 무제한적으로 베푸는 삶의 태도로서, 유한한 생명을 가진 동물로서의 인간 본능과 대비됩니다. 그러나 개개인의 차원에서 볼 때, 사랑은 희생의 동의어가 아닙니다. 양자간의 감정 교류를 지속적 관계로 유지하기 위한 여러가지 노력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적어도 증여만큼의 보상을 상대에게 갈구하는 양가적 속성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사랑은 최선의 ‘교환’을 위한 서로의 투쟁이기도 합니다.
최초의 연인은 자신의 온 존재를 상대에게 투사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는 ‘한계효용'의 굴레 속에서 상대방의 마음을 적절히 쟁취해 내야만 합니다. 그러니까, 최선의 주고 받음을 통해 두 사람이 마침내 ‘합일’에 이른다는 추상적인 수사에는, 자신이 가진 재화, 즉 사랑하는 마음의 대체재를 얼마나 적절히 상대에게 분배하고 수거할 수 있느냐의 전략 싸움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무구한 사랑은 헛것과 다름없습니다. 실제로는 단단한 암석과 습기로 이루어진 이데아의 동굴 속에서, 사랑이라 명명한 촛불을 지켜내는 물리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연인은 한때 서로의 모든 것이었으나, 끝내 아무것도 되지 못합니다. 먼저 사랑은, 초기 생성되는 호르몬의 유통기한 이후 폐기되기 일쑤입니다. 기어코 견뎌내더라도 더 많은 숙제가 길 앞에 산적해 있습니다. 그것을 공동의 미래라고 부릅니다. 우선 결혼이라는 사회적 제도로의 편입 여부를 합의해야 합니다. 같이 살 집을 마련하고, 그 집을 갚아나가며(가꿔나가며), 별개로 노후를 준비하며 자산을 축적해야 합니다. 그러는 와중에 수시로 바뀌는 호르몬의 난동과 성격과 생활 습관의 차이를 감당해야 하고, 각자의 부모님과, 원한다면 아이까지 책임져야 합니다. 두 손 잡고 산책하는 노부부를 예찬하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그 수많은 파산의 난관을 통과해 낸 물리적 시간에 대한 경외랄까요
사랑의 크기를 단순 지표로 가늠할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요? 그러면 누구도 불필요한 오해 때문에 서로의 감정과 시간을 소비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보다 더 간편한 방식으로 인연을 꾸려나가고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랑은 동일한 조건에 놓여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동굴 속에 묻혀있는 각자의 보석을 캐내어 상대에게 제공합니다. 그러나 애초부터 그 고유한 크기와 규모는 개인별로 상이하며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사랑이라는 행위는, 저마다의 총량 내에서 꺼내놓은 고만고만한 보석들이 얼마나 특별하고 대단한 건지, 서로에게 증명하려 애쓰는 일의 연속입니다. 그것의 효용가치와 희소성을 주제로 한 웅변대회입니다.
그리고 연인들은 실패합니다. 한정된 재화로 최선의 결과를 도출해야 하는 우리의 처지는 그래서 비극적입니다. 가장 아름답던 시간이 일종의 재무제표로 전락하므로 이제부턴 손익분기를 따져야 합니다. 사랑은 한쪽이 먼저 끝나기 전까진 결코 예측하고 속단할 수 없습니다. 마음의 단순 크기와 수량으로 상대의 마음을 면면히 파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싸움은 우리가 가진 자원이 한정적이라는 조건 때문에 시작됩니다. 자신에게 설정된 한도 내에서 모든 사랑을 탕진한 쪽이 필연적으로 파산합니다. 먼저 파산한 쪽에서 이별을 결심하곤 합니다. 더 이상 줄 게 없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상대방보다 조금 먼저 슬퍼할 수 있는 권리를 얻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비극을 자꾸 되풀이합니다. 시간이 괴로움을 망각할 즈음 찾아오는 부조리와 싸우기 위함일까요. 사람들은 저마다의 사랑을 재발명합니다. 함께 숨차게 퇴근길 언덕을 오르던 연인은 이제 곁에 없지만, 눈물 콧물 범벅되어 꼬질꼬질한 이 시간을, 서랍 뒤편에 떨어뜨려 잊고 살던 동전처럼 여전히 유효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믿곤 합니다.
언젠가 함께 걷던 벚꽃 날리는 달맞이길, 생전 처음 가본 와인 바, 키가 맞지 않는 탁자 밑에 접어둔 종잇조각, 차곡차곡 개어둔 지난 계절의 침구류, 함께 요리해 먹으려 넣어두었다 잊고 살던 냉동실의 식자재들. 더 거슬러 가보면, 갓 제대하고 복학한 첫날, 신입생 환영회에서 마치 영화처럼 내 눈앞을 지나가던 나의 첫사랑. 경희대 운동장에서 기억도 안 나는 일로 싸우다 헤어지자고 말하며 엉엉 울던 네 모습. 당신도 나도 볼 수 없었겠지만,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못난 모습으로 당신의 눈동자 한 편에 뒤돌아 서 있던 내 모습. 추억 깃든 물건들 하나둘 정리하던 처참함과 후련함. 십여 년이 훌쩍 지나 우연히 본 당신, 지금은 누군가의 아내이자 엄마가 되어 행복한 당신의 모습을 잠시 떠올려봅니다.
혼자일 땐 부유한 줄 알았던 내 마음이, 둘이 있을 땐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오로지 사람을 만나 사랑하고 이별했던 시간 덕분에 저는, 이전에 제가 가졌던 사랑의 총량보다 과분할 정도로 많은 것들을 안을 수 있었다 위안 삼아봅니다. 지난 인연들의 앞날에 행복을 빌며, 저도 보다 더 행복해지기 위해 지난 시간들과 작별하고자 합니다.
본 전시에서는, 저와 다른 이들의 경험에 비춘 사랑의 발명과 그 실패의 흔적들을 글과 그림으로 변환하여 되도록 ‘은유적’으로 제시합니다. 운명의 불확실성 속 유일한 질서이자 위안이었던 사람, 주어진 시간과 재화의 한계속 효용가치로써, 끔찍할만큼 생생하게 살아있음의 순간을 상기시키던 사랑의 의미를 되짚어 봅니다.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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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이야기 하기 앞서 먼저 정리해야 할 것은,
보잘 것 없던 것이 우리의 의지였는지,
아니면 당신과 나였는지를 분간해야 하는 일일 거예요.
나의 다짐은 당신이 다시 올 수 없게
현관의 비밀번호를 바꾸는게 전부였지만요.
그렇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오늘의 비는 어제의 구름이고 누군가의 그늘이었다는 게 위안이 되요.
빨래를 미루었어요.
달이 뜨면 밤하늘보다 검어지는 느티나무,
사이로 잠들지 못하는 작은 새의 그림자,
밤하늘로 아침의 씨앗을 흩뿌리며
이 별의 가장 어두운 시간을 견뎌요.
어쩌면 당신은 배가 부르면 조금 덜 슬프다는 걸 알게 되었을거예요.
그만큼 더 기쁠 일도 없는 나이가 되었겠지요.
그럼에도 오래 전 우리의 불행했던 4월은 변하지 않아요.
오래 전 당신과 나는 벚꽃과 벚꽃 사이 정류장을 통과하고 있었어요.
아스팔트보다 낮은 곳에서 하천을 따라 물비늘의 죽음을 미행하고 있었어요.
당신과 나의 의지는
어느 봄의 순환선에서 내릴 역을 찾지 못하고
무작정 솟아오르다
추락했지요.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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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들은 맨발로 헤어져요.
밤새 바스락거리며 슬퍼하고
내 것 아닌 머리카락을 청소했어요.
부드럽던 당신 손길 툭툭 털어내면
내일은 얼마나 더 따가울까요.
일년은 겨울에서 시작해서 겨울에서 끝이 나고,
두 동강 난 계절 사이를 의젓하게 왕복하며 살아요.
서로가 서로에게 유행하는 짧은 전염병이었길 희망합니다.
사랑 했던 사람들은
높디 높은 골목길을 맨발로 떠났어요.
대낮 어느 모서리에 숨어있던 햇볕에게
오래 전 내 눈가에 숨겨둔 모래알 몇 개를 들켰지만
뭐 어쩌겠어요.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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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마음을 기념품으로 간직하세요
2021. 1.6 - 2021. 1. 29
인스턴트 루프
이 글은 마지막 문장에서 시작되는 글입니다. 이 시작을 위해 그 짧은 글을 얼마나 뜯어고쳤는지 모르겠네요. 돈 몇 푼 안 되는 곳에서 서로 젊음과 재능을 탕진하는 미술을 미워하는 글을 신나게 썼다가, 실패했던 연애를 반추하며, 나의 그림은 자꾸만 왜 지나간 사랑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려 하는지 반성하고, 미술 때려친다 소리를 입버릇처럼 토해내다가도, 왜 아직도 작업을 못 놓고 있는지 쓰다 보니, 오늘이 벌써 전시 오픈날입니다.
오래전에 노르망디의 어느 냇가에서 주워왔다는 이상한 돌멩이를 선물 받았습니다. 한 손으로 쥐기엔 커서 손바닥 가득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큰 건 아닌 어설픈 하트모양의 돌이었습니다. 몇 번의 이사를 하고 시간이 지났어도 이 돌은 저를 꾸역꾸역 따라다니네요. 저는 이 돌을 책상 위에 두고 멍하니 보기도 하고, 손에 쥐어서 살짝 던져보기도 했습니다. 이 쓸모없고 무능한 돌을 보고 있으면, 선물해준 사람이 저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빤히 쳐다보는 것 같기도 하고, 볼 장 다 봤다는 듯 무심하게 쏘아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아무리 시간이 구역질해도 이런 느낌은 게워지지 않습니다.작업하는 마음이 꼭 그렇습니다. 애매한 재능 덕분에 미술과 무관한 일을 하며, 한동안 이별한 것처럼 잊고 살다가도, 전시가 잡히고, 회의하고 작업을 생각하다 보면 어느 날 가슴 속에 이 돌멩이가 턱 하고 얹혀있네요. 소화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뱉어낼 수도 없습니다. 어떤 얘길 해야 하나. 내가 과연 새로운 작업을 할 수 있을까. 작업하는 동안 생업이 또 유예될 텐데 하는 생각. 헤어진 연인 집에 물건 찾으러 가는 것처럼, 진짜 끝난 줄 알았는데 다시 조우해야 하는 어색함. 미술이 때로는 ‘개인신용대출’과 같은 일반적인 삶을 제한하기도 합니다.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없게 만들고요. 덕분에 졸업 후엔 매 전시가 임계점이었네요. 많은 관계를 망치고 자리를 오염시킨 저 자신이 혐오스러웠고요.
오늘 전시를 오픈하였으니, 내일부턴 저는 다시 미술 바깥으로 돌아갑니다. 여기 오신 대부분의 분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누구나 예술을 하고 일상을 예술로 전환한다는 말은 너무 낭만적입니다. 경제가 예술을 필요로 하는 때는, 그 자체가 교환가치가 되거나, 그 위에 고결한 스킨을 덧씌워 가치를 높이려 할 때뿐입니다. 경제적 심미성과 우월성에 편입되지 못하는 예술은, 오로지 오늘만 사는 개인들의 각오로 충당해야 합니다. 그러니 미술은 아예 작정하고 한 번씩 궤도를 이탈하는 일이라는 게 더 적절할 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저 또한, 하기 싫은 일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미술은 이제 내 인생의 전부가 아닙니다.그럼에도 내가 작업을 되풀이하는 이유는 이것이 내가 아는 사랑의 종류를 증명할 수 있는, 여전히 유효한 비경제적 활동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미움과 연민을 꾸역꾸역 채워 넣는 역겨운 일기장이고, 아예 잘 모르는 건 저절로 망쳐서 구겨 버리는 침묵의 전략이기도 합니다. 삶이 주식 차트가 되고 인생이 호봉과 급수로 분할되지만, 인간이 어찌 그리 쉽게 재단이 될 수 있을까요. 경제의 규격에 욱여넣지 못한 잉여의 마음을 주워 담는 일종의 수렵 활동을 저는 미술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나눠 먹는 것을 사랑이라 부르고요.
나는 내가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들을 드로잉 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온전히 재현될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때의 감각이 임의의 물질에 투영되어 영원한 빛을 반사할 수 없을 테고요. 나는 내 그림이 자랑스럽지 않고, 때론 좀 슬픕니다. 그렇지만 쓸쓸한 이 그림들은 계속 쓸쓸하게 내버려 두겠습니다. 서울의 아파트값이 상승하고 물가가 치솟고, 아기가 태어나지 않고, 그림들은 오래되어 바스러질지언정, 한때 누군가를 ‘사랑했던 사실’은 변하지 않는 것에 감사하면서요. 그리고 그 사랑하는 마음을 기념하려 합니다.
추운 날 여기까지 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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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한데 너무 슬퍼서 말해줄 수 없어요
2018. 8.3 - 2018. 8. 19
소마미술관 드로잉센터
왜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슬픔이 부여되지 않는 걸까, 혹은 당신이 사랑하는 것들은 왜 항상 가난할 걸까. 어째서 좆같은 일들은 곳곳에 산재하는가. 여기 실린 글과 그림들은 이러한 질문들을 지속해서 되감아 놓던 특정한 감각 속에서 제작되었다. 당신이 어디선가 목격했을 법한 미미한 일상과 불행의 낙차에 관한 개인적인 기록이기도 하다. 이것들이 대부분 과장되거나 은폐된 까닭은, 여기서 무언가를 온전히 말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환멸은 인식이고, 불능은 상태이며, 둘이 합쳐진 냉소가 오랫동안 내 시간을 지배했다.
무엇이 되는 것과 무엇이 되지 않는 것 사이에 이 그림들은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이 그림들로 온전한 무언가를 세우진 못할 것이다. 대신 무엇이 무너졌으며 무엇이 재건될 것인지를 암시하는 임시적 가림막 같은 용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음식이 식어서, 애인의 마음이 멀리 있어서, 네가 나보다 가진 돈이 많아서, 언제인지 모를 죽음이 두려워서, 정치를 통한 진리의 실현이 도무지 불가능해 보여서, 그 자리에 증오가 자기 나라의 깃발을 대신 휘날릴 때, 그 모든 것의 형편없는 모사물이자 시답잖은 농담으로써 종이 위에 드로잉을 가져다 놓았다. 곧 철거될 것이므로 이것들은 대부분 엉성하고 조잡하여도 무방하다. 드로잉이 효율적으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어떻게 그리느냐는 별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책을 만들려고 여기 저기 방치해두었던 오래 된 그림들에 저마다 제목을 붙여 보았다. 그림 뒤로 억장이 무너진 풍경들, 속지 않을 거짓말, 형편없던 연애, 가난하고 예쁜 사물들을 생각했다. 아무도 바다에 살진 않지만, 누구도 바다를 폐허라 부르지 않듯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곳에 이름을 주면, 그곳에 이름이 머물 자리가 생겼다. 오는 길을 찾는 너의 눈과 한때 내 눈이 걸었던 발자국이 겹친다면, 그림으로 가려진 풍경의 얼굴이 내장처럼 쏟아질지도 모른다. 내가 보았던 것들은 늘 그림 밖에 있었다.
나는 당신의 마음이 내년 봄을 위해 기꺼이 바스러지길 바란다. 무책임한 슬픔이 되어 낙엽처럼 굴러가길 바란다. 이토록 좆같은 세상의 비루한 우리 삶을 사랑하고, 이 속되고 속된 작업을 지속할 힘은 보시다시피 그리 대단한 게 아니다.
2018
Artist’s Statement
Why is the sorrow given to everyone not equal? Or, is what you love always poor? Why does fucking something happen everywhere? Writings and drawings here were produced based on my specific sense that consistently rewound those questions. They are personal chroniclers of my insubstantial everyday life and unhappiness I have probably observed somewhere. These are mostly overstated or concealed because I felt talking about something is of no significance. That being said, disillusionment is a perception and impotence is a state while my time has been governed by cynicism fusing the two for a long time.
I think these drawings can exist between something attainable and something unattainable. In other words, I cannot achieve something sound with my drawings. Instead, these may work as a makeshift indicator of what should be reconstructed when something has collapsed. Hatred is prevalent because food gets cold, my lover is out of mind, you have more money than me, I fear death to come, and the realization of truth seems impossible through politics. I brought drawings to the surface of paper as horrible reproductions of everything or trivial jokes. I don’t care that they are mostly poor and shoddy as they are soon removed. How to draw was not an important issue in order for a drawing to perform its goal effectively.
I gave titles to drawings I did a long time ago to publish a book with them. I thought of heartbreaking scenes, lies nobody is deceived by, a horrible date, and poor and pretty things. Although nobody lives in the sea, nobody calls it a ruin. As such, if a title is given to a place with nothing, it comes to have a presence. If your eyes in search of the way you have trodden are overlapped with my eyes, the faces of hidden scenes may be unmasked entirely. All I have seen is always outside my drawings.
I hope your heart is willingly broken for next spring. And, it turns into an irresponsible sorrow and rolls over like fallen leaves. It is not such a great thing that we love our abject lives in this fucking world and have strength to continue worldly work.
(This is compiled from writings and drawing I did in my spare time between 2010 and 2017.)
2018
첫 개인전을 위해 적었던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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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용 탐구생활
손송이 (미술비평)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과 선뜻 이해하고 싶지 않은 일들로 가득하다. 나를 사랑한다고 오랜 기간 열렬히 구애하던 사람이 어느 날 내 목덜미에 총구를 겨눠 방아쇠를 당기고는 날카로운 도구로 살점을 분리해 천천히 먹어 치울 수 있다. 대학원 지도교수가 당신을 사무실에 가둬놓고 야구방망이로 때리며 인분을 먹으라고 명령할 수 있다. 여름 휴가를 가기 위해 탄 비행기가 상공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수 있다. 가족의 일원으로 어여삐 여기던 애완견이 자고 있던 우리의 아이를 물어 죽일 수 있다. 휴일 오후 난간에 기대 이불에 붙은 먼지를 털다가 균형을 잃고 추락사할 수 있다. 카페 화장실에 갔다가 자신의 얼굴과 생식기가 찍힌 영상이 온라인에 유포되어 희롱당할 수 있다. 이별을 통보하거나 성관계를 거절해서 기절할 정도로 맞고 또다시 끌려가서 죽을 때까지 맞을 수 있다. 대답이 느리고 어눌하다는 이유로 군대 선임들에게 구타당해 죽을 수 있고, 늙었다는 이유로 자식에게 폭행당할 수 있으며, 쌀을 준다는 말에 잘 알지도 못하는 어떤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는 이유로 불시에 뒷산으로 끌려가 학살을 당할 수도 있다. 실제로 배신과 비극은 도처에 상시 도사리고 있다. 우리는 언제라도 뒤통수를 맞을 수 있고 믿는 도끼에 몇 번이고 발등을 찍힐 수 있다. 이준용의 드로잉을 보면서 내가 가장 많이 떠올렸던 생각은 바로 이러한 세계의 불가해함과 폭력성, 그리고 우리가 그것들에 완벽하게 대비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 뒤따르는 지독한 무력감과 어느 무엇도 전적으로 믿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불안에 관한 것이었다.
안정된 기반을 쉽게 상상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이준용의 드로잉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자신과 타인을 고깃덩어리와 같은 존재로 여기거나, 삶이란 고작 똥 밭에서 까르르 웃으며 뒹구는 좆같은 것이라고 뇌까리거나, 파국의 직전을 거듭 상상하며 앞으로 닥칠 일의 공포를 상쇄해보려 하거나, 끊임없이 자기증명을 요구하는 이 사회에 자신의 무능을 뻔뻔스럽게 과시해 보이거나, 불운한 경험들의 쓸모를 애써 찾아 헤매거나, 생식기에 혈류량을 증가시켜 팽팽하게 만드는 일에 얼마 남지 않은 힘의 일부를 소진해 보거나, 웃으며 송곳니를 슬며시 드러내는 은근한 방식으로 일종의 복수를 했다고 자위하기도 한다. 작가 자신을 대변하는 듯한 드로잉 속 남자는 눈물이 방울방울 흐르는 주말 연속극의 주인공이 아니라 깨진 맥주병처럼 온몸의 수분이 터져 나와 이리저리 묻어 나는 호러 영화의 주변 인물에 가깝다. 외롭고 무섭고 아프고 무기력하고 어쩐지 억울하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실토하고 싶지만 그런 말은 너무도 진부하고 하나 마나 한 것이어서 어차피 누구의 이렇다 할 관심도 끌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며 한참을 에둘러 표현하거나 속삭이듯 혼자 우물거리거나 아예 딴청을 피우거나 짐짓 시시덕거리기로 한, 어리지도 노쇠하지도 않으며, 부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찢어지게 가난하지도 않은,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봐도 가난한 쪽에 더 가까운, 뭐든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모르지도 않는, 애매하고 방어적인 등장인물 말이다.
이 인물이 성과 폭력이라는 주제에 자주 이끌리는 것은 아마도 그가 입은 상처 때문인 것 같다. 형체를 분명히 묘사할 수 없고 만질 수도 없지만, 분명히 실재하는, 어쩌면 결핍으로 이루어진 것일 공포를 잊거나 견디기 위해서 그는 성적 욕망이나 매운 음식과 같은 말초적인 자극을 좇고 때로는 ‘고문 기계’ 등을 만들어 자신을 스스로 괴롭히기도 한다. 그의 한쪽 팔이 다른 쪽 팔에 칼자국을 내는 순간 육체적 고통은 ‘자기’라고 칭해진 것의 경계를 선명하게 그려내고 뜨거운 피를 쏟게 하여 잠시나마 그에게 살아있다는 느낌, 삶에 대한 확신 비슷한 것을 준다. 그게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언가 중요한 것이 아무래도 자신에게 부재한 것 같을 때, 투명한 빈 주먹 같은 것이 얼굴과 명치를 계속해서 가격하는 듯한 기분일 때, 그러나 자꾸만 혀가 굳어버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때, 그가 자신에게 기꺼이 가하는 신체적 위해는 적어도 그로 하여금 반사적인 비명이라도 지르게 하거나 일순 움찔하며 주먹을 꽉 쥐게 함으로써 역설적인 안도감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서 다시 한번 더 상기해야 하는 사실은 이러한 자학-쾌의 기제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폭력의 경험이 이미 내재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야 비로소 한때 그토록 원치 않았던 것을 이제는 무의식적으로 갈망하게 되는 기묘한 드라마, 한 편의 비극적인 희극이 시작되고 또 되풀이되는 것이다.
그가 작업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작가가 직접 어느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그 의도란 바로 “계급적 박탈감과 정치적 무력감을 양산하는 시스템에 대한 적의를 개별적이고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 말쑥한 모범답안이 그의 입을 통해서 나왔다는 것이 왠지 미심쩍기는 하지만 그의 작업 전반에는 실제로 정의롭지 않은 사회 시스템에 대한 비판이 반영되어 있다. 이준용은, 시시때때로 오와 열을 맞춰야 하고 어떠한 긴급한 상황에서도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학교의 전체주의적 시스템, 사제의 말, 즉 신의 말에 따르는 맹목적인 믿음이 전제되는 종교 시스템, 인민의 생명과 안녕을 지켜내지 못하는 무능한 정부일지라도 비판하지 않을 것이 장려되는 국가 시스템, ‘정숙한’ 아내를 공식적으로 치하하며 지속되는 가부장적 시스템,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 마저 체제 유지의 동력으로 삼는 괴물 같은 신자유주의 시스템 등이 양산하는 일상의 구체적인 풍경들을 묘사하고 빈정거린다. 이 모든 시스템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위와 아래를 구분 짓는 질서가 있다. 이 위계적 질서는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들이 자신보다 약해 보이는 상대에게 무심코 혐오와 모멸감을 주고받게 하고, 그로 인한 신체 및 정신적 제약을 양산하는 주요한 원인이 된다. 둘째, 경쟁과 폭력, 규율과 기만에 의해서 유지된다. 폭력적인 경쟁의 장면은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2018)에 잘 표현되어 있다. 셋째, 허상 같은 이데올로기에 기대어 있다. <빨갱이는 죽여도 돼>(2018)에는 흐느적거리는 빨간 광고 풍선 위에 “빨갱이는 죽여도 돼”라는 자극적인 선동 문구가 적혀 있는데, 이는 반공 이데올로기가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작동해왔고 작동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누구라도 철저하게 시스템의 바깥에서 살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회 시스템이 그 구성원들에게 부과하는 여러 한계과 절망을 견디거나 극복해야만 우리 각자가 삶을 지속해 나갈 수 있다.
이준용의 드로잉은 이러한 체제들을 구성하는 합리성의 안티테제다. 그리고 닫힌 형식의 명제 바깥으로 하릴없이 비어져 나오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파토스의 세계이기도 하다. 그림 속 작가로 추정되는 인물은 국정원 규탄 집회와 교내 청소 노동자 시위 등에 관심을 쏟고는 있지만, 그와 같은 집단적 움직임에 온전히 가담하지 못하고 주변을 어정거려 ‘가두행진’을 ‘은밀한’ ‘나의’ 것으로 만든다. 사회학적인 연구에 다 담길 수 없는 세밀한 맥락과 감정들, 즉, 특정 세대가 공유하고 있는 어떤 현상으로서의 비참이 아니라 개개인이 제각기 다르게 겪고 있는 실존적인 견딤의 상태들이 곧 이준용의 그림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다. 그는 자신이 마주한 고유한 삶과 마음의 결을 기록함으로써 그것들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가 채색을 할 때면 값싸고 얇은 종이는 작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마음 여린 사람처럼 속절없이 울어버린다. 또, 그가 공산품인 스팸을 실크스크린이 아니라 수채화로 여러 번 재현하기를 고집할 때, 다시 말해, 공장식 대량 생산 시스템을 차용한 팝아트를 패러디하면서도 가급적 비효율적인 방식을 취하기로 결심할 때, 스팸은 95.76%의 수입산 돼지고기와 정제수, 정제 소금, 비타민C, 백설탕, 아질산나트륨, 카라기난, 혼합제제가 들어있는 삼천백 원짜리 일반명사 같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오물로 가득한 공장식 농장 안에서 빛을 거의 보지 못하고 간신히 네 발로 자신의 살과 내장의 무게를 지탱하며 자주 눈을 감은 채 숨을 몰아쉬었던 다른 모든 돼지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한 마리의 돼지를 상기시키는 진정한 고유명사가 된다. 스팸과 마찬가지로 내추럴 스케치북의 표지도 그는 계속해서 그려나갈 수 있다. 문득, 인생은 하나의 긴 노래를 온종일 매일 매일 질리지 않고 부르는 일 같다.
작가가 자신의 주관적 경험과 자기 이미지에 천착한다고 해서 그의 드로잉이 궁극적으로 어떤 자폐적인 1인칭의 세계를 강화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가 꾸미는 무대는 생각보다 더 미묘하고 복잡하다. 작가 자신의 일상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에서도 그는 언제나 “그건 제가 아니라 그저 그림일 뿐이에요.”라고 둘러댈 수 있다. 작업 속에서 이런저런 행동을 하는 인물들은 언제나 이준용의 뇌와 손을 거친 것이면서 동시에 작가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닐 수 있다. 평소 그는 자신이 경험한 것들을 틈틈이 메모해 두었다가 이를 바탕으로 완전한 허구도 아니고 완전한 실제도 아닌,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기억은 잘 안 나는 어떤 인물의 전형을 그려낸다. 그렇기에 이준용의 드로잉은 일견 단막극의 한 장면 같다. 화면은 대체로 몇몇 주요 인물들과 대사 및 행동을 중심으로 하나의 서사를 상상하기 쉽도록 구성되어 있다. 제법 구체적인 상황 속에 얼마간 구체성을 결여한, 어떤 꺼풀과도 같은 캐릭터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배역을 외투처럼 걸쳐 입고서 해당 인물이 겪었을 여러 감정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이준용이 그림 속에서 맡은 여러 구체적인 배역들, 그리고 본의를 겹겹으로 위장하거나 부정하는 듯한 그 특유의 화법은 사회의 구조와 체계가 각 개인의 삶의 양태를 결정하면서 양산하는 “지속적인 불능의 감각”에 저항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어떤 페르소나를 설정하여 연기를 해 보임으로써 자아(self)의 경계를 보다 신축성 있게 만든다. 가령, 작가는 ‘내가 우울했다’가 아니라 ‘내가 우울을 연기했다’고 말함으로써 우울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벗어날 수 있는 허구적인 것으로 만든다. 즉, 우울이라고 추정되는 무언가가 신체에 반영되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 그가 실제로 우울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그에게 우울을 우울이 아닐 수 없게끔 하는 우울의 본질을 물을 수 없고 또 근대적 극복의 서사도 기대할 수 없다. 이 연기의 고정 관객은 물론 그 자신이다. <자화상 그리기 과제>(2013)에는 자신을 관객으로 앞에 두고 자기 연출을 시도하는 작가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 작업에서 그는 현실의 자신과 동일한 캔버스 안의 자기 이미지를 마주하고는 침을 뱉으며 한 손의 중지를 위로 세우고 있다. 작가는 2018년에도 이와 유사한 그림인 <가끔씩 나는 눈물을 흘린다>를 그렸다. 한 가수가 싸이월드에 올린 눈물 셀카를 패러디한 이 그림에서 작가는 원형의 탁상거울에 비친 자신의 우는 얼굴을 바라보며 중지를 세우고 있다. 때로 그는 돈을 벌지 못해 죄송하고 졸업을 못 해 죄송하고 배필을 찾지 못해 죄송하여 조상님께 무릎을 꿇기도 하고 ‘누가 내 진심을 훔쳐 먹었을까?’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기묘하게도 이러한 자기 연기는 생각보다 힘이 세다. 애석하지만 비빌 언덕이 영 없을 땐 이런 힘에라도 기대어야 우리가 우리 자신을 견딜 수 있다. 은희경의 소설 『태연한 인생』에서 가족여행을 떠나기 직전에 남편의 불륜을 알아차린 류의 어머니가 “잠시 눈을 감고 자신이 맡은 배역의 감정을 잡은 다음... 천천히 무대로 걸어 나갔”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현실이 어떤 방식으로든 참을 수 없는 구석을 품고 있지 않다면 자기 부정과 연결된 자기 상연은 사실상 불필요하다. 그러나 작가가 자신의 맡은 배역을 수행하는 데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술 먹고 울었던 날> (2015-2016) 속 이준용은 어느 술자리에서 죽은 친구를 회상하며 슬퍼하는 척을 하다가 정말로 슬퍼져서 울어 버리고 만다.
이준용의 드로잉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 중에서도 가장 끈질기게 조소와 부정의 대상이 되는 이는 단연 그림을 그리는 이준용 자신이다. 미술을 전공한 학생 이준용은 팬티와 학사모만 몸에 걸치고서 양쪽 발가락으로 야무지게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붙들고 탐독하는 한량이자, ‘Post 어쩌고저쩌고’라는 막막하고 거대한 기둥 앞에서 그림을 그리는 수많은 미대생 중 하나로 묘사된다. 어떻든 미술 작업을 계속해 나가고 있지만, 예술은 부술 수 없는 것을 부수려는 시도이므로 주먹보다 약하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드로잉은 다른 매체들 보다 자주 평가절하되는 경향이 있으므로 다른 예술들이 부술 수 없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부술 수 없을 것 같다. 그리하여 그는 <어서어서 드로잉을 불태우고 캔버스로 기어들어 가자>(2013)와 같은 드로잉을 그린다. 그러다 이제 더는 그림을 그릴 밑천이 없다는 위기감을 느끼며 앞으로 똥, 고추, 성행위 장면을 그려야겠다고 다짐한다. 그가 그리는 현대미술 작가의 초상은 퍽 처참하다. <현다이 미술맨>(2015-2016)에서 예술가는 눈알이 뽑혀 버린 듯 양쪽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피를 쏟아내고 목발을 짚으며 힘들게 걸음을 떼고 있다. 그의 바지는 반쯤 내려가 있으며 엉덩이에는 혀를 길게 빼물고 초점 풀린 눈을 한 개 한 마리가 붙어 있다. 이러한 불구의 감각은 <딸아 너는 미술을 하지 말아라>(2015-2016)에도 드러난다. 작가가 미술을 하는 자기 자신을 비관하는 여러 작품 중에서 제일 애잔한 작품은 <천천히 미술을 (그만둔다)>(2015-2016)이다. ‘천천히’라는 글자가 가장 진하고 ‘미술을’은 그래도 선명한 편이나 ‘그만둔다’는 증발하고 있는 듯 연하게 쓰여 있다. ‘그만둔다’ 옆에 그려진 해맑은 표정을 한참 보고 있다 보면 이준용은 그림 그리는 일을 곧 관둬 버릴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 부정도 일종의 속임수이다. 그는 내게 “이번에 소마미술관에서 하는 전시가 마지막일 수도 있어요.”라고 말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전시 후에도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좋아하는 작품 몇몇은 전시하지 않을 계획이라고 전했다. 내 생각에 그가 그림을 그리는 그 자신을 희화화하거나 냉소하는 이유는, 타인이 그에게 비난 비슷한 웃음을 퍼붓기 전에 미리 선수를 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누군가 자기를 부정하기 전에 스스로를 부정하는 제스처를 먼저 해 보이는 것이 완전히 부정당하지 않는 방법이라는 것을 간파한 이준용은 늘 한발 앞서서 회심의 한방을 숨겨두고 있다.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하는 것보다 단념하게 하는 것이 더 많은 이 시대에, 그는 이러한 비관주의자의 조심스러움으로 지치지 않고 작업을 이어나가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천천히 미술을 (그만둔다)>는 미술을 그만두고 싶지 않다는 작가의 속내와 안간힘의 표현과 다름이 없다. 종이와 연필만 있다면 누구라도 스스로를 일으켜 세워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근사한가. 미술사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작품들을 그가 작업 곳곳에서 패러디 하는 것만 봐도 미술에 대한 그의 애착을 짐작할 수 있다.
또, 그의 그림들을 가만가만 살펴보다 보면 그가 우리 사회의 병리적 현상을 끔찍하게 묘사하는 데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고 있는 무고한 존재들에 연민을 표하고 또, 거듭되는 실패를 예감하면서도 진심을 주고받는 관계를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혹 당신이 이준용의 그림에 포함된 상스러움과 역겨움을 이해할 수 없거나 이해하고 싶지 않아 작품 감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재개발 지역의 지친 개를 그린 <힘들어서 못 살겠다>(2014), 쓰레기 더미들 사이에서 죽은 새끼를 지키고 있는 어미 고양이를 그린 <새끼 곁에 오래 앉아있던 어미>(2015-2016), 음악 하는 친구를 위해 그려준 앨범 표지 그림 <민병이와 밍츄>(2017), 조카의 첫 유치원 등원 길을 그린 <처음 유치원 가는 날>(2018), 여자친구를 위해 준비한 꽃다발을 바지 주머니 속의 누군가가 흐뭇하게 보고 있는 <그녀를 만나는 곳 100미터 전>(2014) 등을 먼저 볼 것을 권한다. 우리가 그의 위악 뒤에 숨겨진 눈물 젖은 손편지 같은 면을 부주의하게 간과한다면 이준용은 어릴 때부터 나쁜 사람이 되기로 작정한 그렇고 그런 못나고 편협한 놈 정도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사회 이면의 부조리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인간 일반에 대한 불신 속에서도 사회적 약자를 향한 애정을 잃지 않으려 한다는 점에서 이준용은 자연스럽게 소설가 커트 보니것(Kurt Vonnegut Jr.)을 연상시킨다. 유머는 이 둘 모두에게 인생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한발 물러서서 안전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방법이다. 일례로, 이준용의 <유서>(2015-2016) 속 쪽지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다. “선생님! 저는 너무도 불온하여서 필시 이 사회에 혼란을 가중시킬 것이 우려되는바, 부득이하게 스스로 목을 매었으니 저를 많이 칭찬해 주십시오!!” 누군가 사회의 안녕에 기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을 자살이라 결론 내리고서, 죽기로 한 바로 그 순간에조차 타인의 인정을 갈구하는 이 이상한 상황은 보는 이들의 실소를 자아낸다. 대관절 죽고 난 다음에 듣는 선생님의 칭찬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러니 우리는 죽지 말고 계속 살아남아 부패한 사회의 안정에 반하는 ‘불온함’을 때때로 풍겨대자. 보니것이 『나라 없는 사람』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냄새를 피우기 위해서다. 누군가 다른 이유를 대면 콧방귀를 뀌어라.” 우리가 이런 뒷맛이 쓴 고약한 농담에 웃을 수 있다면 그건 다행히도 우리의 마음이 아직은 완전히 지쳐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언젠가 삶이 한시도 견딜 수 없을 만큼 구역질 나는 것일 때 보니것과 이준용의 농담은 완전히 효력을 잃고 말 것이다. 부디 그런 순간이 가능한 한 늦게 도래하고 짧게 머물기를, 오래 웃고 웃기기를, 쓸모없고 볼품없는 사람들이 끝끝내 사랑받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당신 눈 속에 명멸하던 풍경이 초승달인지 그믐달인지
나는 알지 못해요
다만 꽃들은 이른 봄에 태어나 이른 봄에 죽었고요
허공에서 쫓겨난 새들은 아무 데서나 죽었고요
죄 많은 가축은 병에 걸려 죽었겠지요
멸망 아니면 우리, 이분법과 한통속인 거대 서사 속에서
고백과 음모는 수천 년간 진보했습니다
당신의 의미가 여전히 원인 모를 병명인 탓에
온 우주는 가정법의 식민지가 되어 불행했고요
번역되지 못한 엇갈림이 쌓이면
당신의 편지들로 바벨탑을 만들 수도 있었죠
재가 된 심장을 가진 사람들은 더는
태어났을 적 자신의 무게를 기억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무겁고 무엇이 가벼운지를 논하기 위해
모래를 뭉쳐 도시를 세우고, 흰 눈을 뭉쳐 바다를 놓칠 뿐
어쩌면 모두 엄마 뱃속에서 이토록 쓸쓸한 축복에 감염되었겠지요
사실 나는 교회에 가본 적도 없답니다
그날, 이름 모를 순교자의 무덤 위엔 민들레가 폭탄처럼 떨어졌어요
굴뚝 위에서, 전광판 위에서, 크레인 위에서, 곧 무너질 건물의 옥상에서
사람들은 오염된 아침을 불태워 권태로운 밤을 마련했습니다
오래전 당신과 헤어졌던 화양동 어느 놀이터 벤치 위에
봄바람이 수천 년을 흐느끼면 당신은 수천 년간 이별에 피폭되고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으면 평온해질 수 있었어요
보세요, 내 눈은 멀리에 있고 내 귀는 먹어 치웠답니다
세상은 적어도 우리 때문에 끝나진 않을 거예요
네 얼굴에 침을 뱉으면 내 얼굴이 깨끗해질까요
내 얼굴에 침을 뱉으면 네 얼굴이 깨끗해질까요
살처분되는 우리의 비열한 마음이 쏟아지던 구덩이가
파란 방수포인지 기울어진 바다인지
나는 알지 못해요
온종일 폐업이고 날마다 마지막 세일이라는
어느 행상의 갈라진 거짓말 틈으로
가시처럼 박혀있는 오늘의 하늘이
초승달인지 그믐달인지
미안한데 너무 슬퍼서 말해줄 수 없어요.
2018
Whether a crescent moon or a waning moon rose up in your eyes on that day
I have never noticed.
Once flowers were born in early spring and died in early spring.
Birds ousted from the air died anywhere.
Domestic animals with inexpiable sins died from disease.
In a grand narrative in agreement with dichotomy
confession and conspiracy have evolved for thousands of years.
My first love is still a disease whose cause is unknown.
As the whole universe is colonized by meanings, it remains unhappy.
If your letters are not properly translated,
they become a Tower of Babel.
Those who have ashen hearts
do not remember their weight when they were born.
To discuss what is heavy and what is light,
I set up a city of sand.
Perhaps, we all are contaminated with desolate blessings inside the mother.
In fact, I have never been to church.
On that day, dandelions fell on the tomb of an unknown martyr like bombs.
On the chimney, on the electronic display board, on the crane, or on the rooftop of a building soon to collapse,
people spent boring evenings while burning contaminated mornings.
On the bench of a playground in Hwayang-dong where you broke up,
spring breezes weep for thousands of years, and you are bombed by parting for thousands of years.
If you love nothing, you can be in peace.
Look at it. My eyes are far away and my ears are eaten away.
The world will not come to an end due to us.
If I spit on your face, does my face become clean?
If you spit on my face, does your face become clean?
The pit in which our mean hearts are poured
is a blue waterproof cloth or an inclined sea.
I cannot say that today hung between the cracked lies of a peddler
who emphasizes he is on sale all the time
is a crescent moon or a waning moon
because I am so sad.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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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이름은 무언가를 책임지기 위하여 붙이는 걸까? 엄마는 낳아 놓고, 아빠는 버릴 거면서 굳이 지어놓고 도망가는 건 뭐람. 죄책감은 지갑 속에 넣고 다니는 사진처럼, 가끔 꺼내보면 가슴 아픈 정도로 충분해. 세상은 처음부터 가혹한 선전포고였다.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의 시간으로 무엇을 살 수 있을까. 젊은이들은 늙은이들 보다 하루라도 먼저 죽어 젊은이가 됐다. 늙은이들은 젊은이들보다 하루라도 더 살아 늙은이로 남았다. 빈 봉지같이 시끄러운 얼굴들이 2교대로 구겨지고 펴졌다. 그러다 보면 정권이 몇 차례 뒤바뀌었지만 신문에는 특별히 날짜가 필요 없었던 것 같다. 몸속에 사는 서울은 저절로 더러워지기 마련. 하얀 사람들만이 남 몰래 검은 코를 풀었다. 이곳엔 비둘기인지 고양이인지 그놈이 그놈 같은 회색분자들만이 발 밑을 서성거린다. 너희는 정치적 협상의 대상도 못 되는 병신들인데. 인생이 암기 과목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해가 안되면 망하면 되니까.
배부른 자들은 다음 번 배고픈 자들에 의해 멸종될 것이다. 학교 앞 라면집 벽에 가득 덮인 포스트잇들을 봐. 잘 먹고 갑니다. 다들 어디 갈 곳이 있나 보다. 나는 그냥 이 가게가 문 닫기전에 마지막 손님이 되고 싶다. 다만 먹는 속도가 사는 속도보다 느리면 곤란하다. 끝이라는 단어가 불어서 목구멍보다 두꺼워진다. 이것이 삼킬 수 없는 이별의 레시피이다. 연인들은 둘 사이에서 주체적인 별명을 발명해 내지만 결국 각자의 부모가 지어 준 이름으로 초기화된다. 대부분의 연애는 흐린 날씨였고, 가끔 볕이 들 때조차 눈이 부셔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나는 차라리 이불 속에서 일기예보를 맞춰보던 나날들이 유일하게 아름다웠다고 고백하련다. 내일을 생각한다는 건 무척 자랑할만한 일이었지만, 오늘의 날씨는 어제의 날씨에 관심이 없다.
한때 너와 나는뼈와 눈으로 뭉쳐진 작은 공이었으나, 지금 앙상한 거울이 되어 빛나고 있다. 그동안 얼마나 비열한 방식으로 첫사랑의 신화를 비춰왔나. 나는 내가 노력한 만큼의 삶에 실패하려고 한다. 그러니 앞으로는 수치심도 모르는 너의 창자를 비난하렴. 나의 빈곤을 반사하는 너의 눈동자를 비난하렴. 고작 하품에 굴복하는 너의 눈물을 비난하렴. 예전부터 우리는 제목도 모르는 노래를 씨불이며 자라났다. 원치 않은 것들까지 모조리 갖고 싶다고 소리를 질러댔지. 온 우주가 가난을 흥청망청하는 동안에, 슬퍼서 머리 위로 바다를 쌓는 동안에, 모두가 평등한 파도의 높이에서 시급하게 으스러지는 동안에, 우리의 이름은 우리가 태어났을 적 딱 한 번 외우는 저주의 주문이었나 봐. 너는 네 삶이 그렇게 될 줄 알았니?
양윤화와 진행했던 서신교환 프로젝트의 글 중 일부를 수정함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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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눈은 어차피 스스로를 쳐다볼 수 없도록 설계돼서 우리는 가끔 자신이 맹인이라고 확신하곤 해. 눈에는 입도 달리지 않아서 우리는 가끔 자신이 벙어리라고 비약하곤 해. 어쩐지 자기 눈과 입을 먹어 삼킨 사람들을 우리는 선생님이라고 부르더라고. 안도 밖도 볼 수 없게 되었으니 우린 무얼 해야 할까? 형이상학적 높이를 믿으니 으스러지는 것이 정확하지. A4 용지에 pdf나 엑셀로 작성된 구체적인 목록들을 자기 발밑부터 체계적으로 쌓아두다가 중심을 잃으면 되거든. 나는 대학을 다니는 내내 울지 못했어. 종이가 젖으면 발밑이 꺼질까 봐. 학교는 우는 곳이 아니라 믿는 곳이래. 그러니까 대학을 졸업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스스로를 미워하는 거야. 책상이 어질러질 때마다 말이야.
2. 우리는 선생님의 책을 모조리 읽었어. 눈으로 보고 입으로 소리를 내며 읽었지. 선생님의 책은 우리 앞에 어디든 있었으니까. 그런데 선생님은 책을 다 읽기도 전에 또 다른 책을 출판하셨어. 그래서 차라리 선생님이 죽어버리길 기다리기로 했지. 저 창가 식물들의 차렷 자세가 보여? 제일 키 큰 놈이 열중쉬어하면 축 늘어지는 식물들이 보여? 내 뒤로 내가 팬 놈, 너 같은 놈들이 있는 것처럼, 내 앞으로 나를 팬 선생님이, 선생님의 선생님들이, 선생님들의 선생님들이 있는 것처럼. 최초의 인간은 가해자였으니 최후의 인간은 피해자일 거야. 이 진보의 체계를 믿으며 학교에 다녔어. 선생님의 책은 모서리가 없었어. 대신에 우리 얼굴에 모서리 모양의 멍이 들었어.
3. 너에 대하여 생각해. 월세를 내는 날마다 살아있다고 느낀다니 웃기지? 잔고가 빠져 나갈 때마다 아득한 얼굴들아, 내 머리카락도 너고 내 똥도 너고 내 독백도 너야. 내가 아닌 건 모조리 너라고. 너는 어때? 지금 맹인일까? 혹은 벙어리니? 졸업은 했을까? 만약 그렇다면 이미 추악할 테니. 우리도 앞으론 사랑이란 걸 할 수 있겠다. 사랑은 언제나 승리의 행진이었으므로... 그러니까 아무것도 아닌 첫 사랑들아! 그때 옆에 있는 네 손이 왼손인지 오른손인지 알아채는 일은 언제나 가장 급박한 일이었어. 지붕 위를 걷는 비둘기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 우리가 우리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나날들이 사라지고 있어. 그래서 말인데, 오래전에 젖은 발밑으로 무엇이 보였는지 얘기해줄래? 오와 열을 잘 맞추어 있었는지. 졸업은 아무 것도 아니야. 우리는 선생님보다 늦게 죽을 거거든.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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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망은 맨발로 자살했다. 빈둥대는 삶이 무료했다고 한다. 그러나 가끔 주인 없는 신발들이 마음속에서 달그락거릴 땐, 깜빡하고 설렌적도 있다. 나는 할 일이 없어서 그냥 시비가 걸고 싶었다. 약속의 맨 마지막 단어에게, 무턱대고 맹세하는 맹목적인 마음에게, 끝은 선언될 때 비로소 긑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불어터진 눈으로 얼마나 정확히 소실점을 가늠할 수 있었을까? 어쨌든 사랑할 때 옷을 다 잃어버렸으니, 헤어질 땐 적당한 격식의 외투가 필요하긴 했다. 이별은 참 평범했다. 비슷한 외투를 걸친 사람들이 세상에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동그랗게 차곡차곡 쌓이던 시간들이 엎질러졌다. 쭈그리고 앉아 동전을 줍듯이, 나는 앞으로 지급 받을 수 있는 남은 사랑의 개수를 세어 보았다. 일종의 실업수당이랄까. 가끔은 너무 짜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럴 땐 네가 정말 미웠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예를 들자면 2호선 순환선을 돌며 종일 궤도를 도는 기관사들의 손인사처럼, 아니면 술에 취해 코끼리 코를 오른쪽으로 돌다가 왼쪽으로 돌다가, 혹은 에스컬레이터를 온종일 반대로 걸으며, 예를 들자면 너의 마음은 늘 이런 식으로, 예시의 예시로써, 예시 속의 예시로 과거에서 과거로만 예측될 것이란 거다. 이런 경우에 나는 회피하거나 고꾸라지거나 어느 쪽도 선택할 수가 없게 된다. 왜냐면 무엇을 가정해보아도 너는 오지 않을 것이므로. 그래서 늘 할 일이 없었다. 보통 이러한 실업 상태의 마음이 마지못해 떠맡는 일이 헤어지는 일이었다.
불이 꺼진 방에선 눈도 할 일이 없었다. 눈꺼풀을 이불처럼 뒤척였다. 문을 닫아도 꺼억 꺼억 울던 네 울음소리는 잠기질 않았다. 다들 자신의 고통을 타인의 고통으로 착각하면서 살아간다. 단지 고장 난 문을 탓하며, 마음이 그렇게 진화한다. 아주 개별적이고 특수하다 믿었던 우리가 사랑했던 시간들이 훗날 회상하기 편리하게 반올림하여 계산되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물을 때 이미 사랑은 그 곳에 없었다.
오래 전 너는, 내가 버린 마음에게 이별이라는 외투를 덮어 주었다. 그래서 누구의 마음이 누구의 마음인지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의 뒷모습처럼 똑같이 쓸쓸해졌다. 천천히 모래알이 되었다. 그렇게 서걱거리며 진화하였다.
대니얼 데닛 '마음의 진화'를 읽고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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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로잉은 모든 종류의 가난을 용인하는 데 적합한 형식이다. 나는 현재적 관점에서의 이 가난의 원형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가난하다는 것이 ‘없음’에서 유발되는 괴로움의 감정 혹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 ‘없음’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원래 존재하였다가 현재 부재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다. 전자의 경우 필연적으로 시간적 속성이 인덱스로 부과된다. 그러므로 이것은 실재의 세계에 해당하는 명백한 사건 속에서 등장을 한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가 문제가 되는 경우는, 그것이 실제로는 없었음에도 있었다고 믿어버리는 망상에서 기인한다. 그런데 원래부터 없었던 것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하여 아마도 이데올로기 같은 헛것의 믿음들이 호출될 것이다. 나는 작업을 통하여 이러한 ‘없음’의 두 가지 양상들에 대한 소급적 서술을 통하여 현재의 물질적, 의식적 구조를 규명하려 한다.
그러나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역사는 텅 빈 고백의 순간들이다. 자기 자신을 향해 서술되는 역사는 궁극적으로 가짜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누구도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드로잉이 하나의 태도가 될 수 있다. 한 장의 종이로 가짜 거짓말과 가짜 고해성사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가난’하다는 것에 대하여 소시민으로서 스스로의 속물근성을 자각하고 의도적으로 가난한 ‘척’이라는 걸 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에둘러 말하기를 발명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써, 혹은 현재와 과거의 존재의 불일치에 대한 무의식의 반응으로써, 드로잉의 내러티브는 대개 강박적이며 과장된 형태를 띤다.
작업들은 병치된 이항대립적 요소들의 충돌이나 간섭을 통하여 작동된다. 그러나 이때의 충격은 외부로 발산되지 않으며, 내부로만 수렴된다. 모서리와 모서리가 안으로 찌그러지며 헐겁게 기워진다. 속에서 접합되어 엉성하게 뒤집힌 하나가 된다. 이렇게 획득되는 전체성이 임계점으로의 도달을 지속적으로 불가능하게 한다. 내포된 의미들은 사라지고 껍데기(외적 형식)들만 수면 위를 떠다닌다. 이것은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는 세계, 지연되는 세계에 대한 가장 적확한 증언이 될 수 있다.
프리젠테이션과 포트폴리오 최종 제출을 위한 텍스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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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밤을 펼치면 검은색 페이지 마다 온통 빛나는 말 줄임표들이 박혀있다. 우리는 밤 하늘을 한 장씩 넘겨가며 손끝을 베었다,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기 위하여... 이러한 열망들은 모두 작은 바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 가장 작은 바람의 이름이 한숨일 것이다. 말 없는 밤엔 모든 사물들이 후- 불기만 해도 지구 한 바퀴를 돌았다. 그러나 돌아올 때 반드시 원래의 자리를 조금씩 빗겨나간다. 사물의 질서를 기록하는 것은 언제나 그림자의 몫이었으나, 밤은 모든 질서를 소거하였다. 우리가 있던 곳은 애초부터 좌표도 없는 곳이었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였으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미시세계의 역사는 우리의 마침표보다도 작은 미시세계의 키보드로 기록되고 있음을 기억하자. 만약 역사에 수정이 가능하다면 미래도 바뀔 수 있을 것이다. 미래가 바뀐다는 것은 세상이 바뀐다는 것.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 예술을 시작할까? 이 따위의 열망들이 촌스럽다고 말하는 이들을 위하여 군홧발에 으깨지지 않는 역사가 필요하다. 원자폭탄으로도 터지지 않는 역사가 필요하다. 대게 그런 역사는 누군가의 일기장보다도 크기가 작다. 아주 작은 역사는 부서지지 않는다... 이것이 혁명 또는 복수보다 중요한 덕목이다. 이러한 역사를 기억하기 위하여 우리는 밤의 페이지를 넘겼다. 읽을 수록 두꺼워 지는 밤을 넘기며, 손끝을 베었다. 작은 역사들을 번역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역사는 동일한 외연의 반복이다. 반복이 진리를 도출한다. 오늘의 진리는 효율성에 의해 판단된다고. 이러한 체념들은 모두 작은 물방울들로 이루어져 있다. 슬픔이란 몸에서 물을 짜내는 힘이다. 모두가 물에 젖은 밤엔 페이지가 찢겨나기도 한다. 그러나 젖은 페이지엔 손 끝이 베이지 않는다. 말 없는 밤엔 온통 빛나는 말 줄임표들이 박혀있다.
4학년 졸업심사를 위해 적었던 글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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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나는 증오한다. 나를 보고 도망가는 고양이의 꼬리를, 가랑이 사이로 숨겨놓아야 하는 것을, 말라버린 어느 꽃의 갈비뼈를, 가죽으로도 가려지지 않고 튀어나오는 것을, 골목길에서 주운 누군가의 찢겨진 편지를 증오한다. 한 장의 연애편지가 찢겨져 열일곱장이 되면, 열일곱장의 연애편지가 되어 버리는 간편함을, 열일곱 번의 사랑고백에 대한 열일곱 번의 간편한 거절을 증오한다. 기도하는 모든 손의 모양을 증오한다. 목적없는 욕망들에 논리를 부여하려는 손, 필사적인 손, 정액 비린내 나는 손, 소변기의 나프탈렌, 비둘기 똥. 기도하는 손처럼 손 쉬운 것, 기도하는 손처럼 손이 쉬운 것이 추악하다. 밤새 씹어대던 어둠이 세상의 뒷면에 껌딱지처럼 들러붙고, 형광등보다 밝은 해가 뜨면 아침방송에선 매 주 한 명씩 나와 번갈아가며 이런 저런 사연으로 울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바뀌어도 흐느끼는 소리는 똑같으므로, 이 편리한 비열함을 증오해야 한다. 앞으로 우리는 누군가가 먼저 울어야만 따라 울 수 있게 되었으므로... 어떤 시인은 절망을 현재의 유일한 승리로 예언하였다. 시인이 낸 한 권의 시집은 발간 20년이 지난 지금도 해마다 1000부씩 팔려 나가고 있다고 한다. 최근에 시인은 다시 시를 쓰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러나 어차피 예언은 확증에 불과하였다. 미래를 말하는 일은 과거를 말하는 일보다 시시한 혼잣말. 우리는 이 증오를 긍정해야만 살 수 있다. 증오하는 것들로 벽을 세운다. 벽은 많을수록 유리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순수한 증오로서 존재할 수 있다. 사실상 우리는 모두 빈 집에서만 살 수 있다.
2013
*가스파 노에의 <i stand alone>을 보고 이 글을 썼다.
여기서 어떤 시인은 김중식 시인이며 시집은 <황금빛 모서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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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이 본격적으로 시급의 문제로 격하되면서 우리 삶의 눈금도 불가피하게 촘촘해졌다. 그래서 오늘날엔 무엇이든 컵라면처럼 4분만 지나도 불어터질 각오로 임해야 한다. 현재는 미래를 위한 포석일 뿐이고,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미래는 비대해진다. 과거의 노력과 인내는 불은 면발처럼 다시금 현재를 잠식한다. 그러니 애초에 시작을 포기하든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끝없는 실패를 맛보든가. 덕분에 오늘날의 남녀노소는 누구나 스스로 고자 아님 조루라고 쉽게 말하게 되었다. 사랑은 처음부터 없던 것과 같고 이별은 영원할 것만 같다. 어느 쪽이든 불능의 상태인건 마찬가지이다. 이 양극단의 봉우리에 두 손을 저당 잡힌 채, 삶을 담보로 수명을 갈취하거나, 수명을 땡겨서 삶을 베팅한다. 대부분의 인류는 기껏해야 실비보험이나 타먹는 자해 공갈단과 다름없다. 하나의 대상이나 현상이 불가능의 이름 속에서 양 쪽으로 분열된다. 이 분열의 틈 속에 살고 있다. 우리가 틈 자체이다.
여기서 깊이를 거부하는 행위로부터 드로잉은 시작된다. 드로잉은 깊은 것과 얕은 것의 의미를 비교적 간편하게 지울 수 있다. 삶과 죽음의 의미도 없애고, 없다는 의미마저 박탈하려 한다. 불능의 두 지점 사이를 좌표로 설정하고, 그 간극의 깊이를 등고선으로 평면의 지도 속에 변환 표기하는데, 이것이 곧 드로잉이 된다. 표면 아래 실재하는 무언가를 그것의 표상으로 대체하여 표기함으로써 지시하는 대상의 부재 상태, 그리고 부재가 야기하는 고통의 감각, 비물질적인 것에 대한 객관적 서술이 신속하게 가능하다. 음식이 식어서, 애인의 마음이 멀리 있어서, 네가 나보다 가진 돈이 더 많아서, 언제인지 모를 죽음이 두려워서, 정치를 통한 진리의 실현이 불가능해보여서, 그 자리에 증오가 자기 나라의 국기를 대신 휘날릴 때, 그 곳에서 드로잉은 그 모든 것의 부재이자 대리물로써, 종이 위에 가뿐히 존재할 수 있다.
드로잉이 깊이를 제거하였으므로 시간의 개념 또한 의미가 없다. 단지 드로잉은 그 아래 무엇이 이미 무너졌으며, 그 위에 무엇이 곧 재건될 것인지 암시만을 남기는 가림막이나 임시적 표지판으로 기능할 수 있을 뿐이다. 곧 철거될 것이므로, 이것들은 대부분 엉성하고 조잡하여도 무방하다. 드로잉이 효율적으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어떻게 그리느냐는 별 중요한 문제가 되질 않아왔다. 어차피 드로잉 속 내러티브나 과장된 이미지들은 사실상 어느 완전한 상태도 지시하지 못한다. 본질적으로 이러한 드로잉은 종이의 바깥에 존재하는 무언가의 ‘없음‘에 대한 증명 중 어느 한 수식과 같다. 그러므로 모든 드로잉은 에둘러 말하기를 유일한 방법론으로 실천하는 중이다.
4학년 스튜디오 발표를 위해 적었던 글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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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빵
1. 자해
사실 자해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다른 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특별한 정체성을 갖고 싶었던 소년의 속물적 욕망이라고 보면 될까? 미술을 시작한 것도 남들보다 조금 더 특별해지고 싶어서였다. 보통의 미술가들이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재능이 있어서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 일 테지만, 나는 그냥 좀 있어 보이고 싶어서 시작했을 뿐이다. 미대 입시는 꿈도 못 꾸는 형편에도 나는 검정색 긴 화통 속에 그림 대신 문학과 지성사 시집 한 두 권 둥글게 말아 넣고 다녔다. 없는 집에서 자식 둘이 미술을 하는 건, 정말 소질이 있거나, 아니면 별 생각 없이 산다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내 경우엔 후자였던 것 같다. 앞으로 먹고 살아갈 문제보다 오늘의 내가 당장 특별해지는 게 중요한 문제였다. 게다가 팔에 흉터 같은 것도 있으니, 칼빵이 가장 어울리는 직업으로 고뇌하는 예술가가 적합할거라고 판단했다.
사실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죽음을 가장해서라도 관심을 받고 싶었을 뿐이다. 정신과 치료에 갔을 때도 내가 죽기 싫어하는 걸 의사가 눈치 챌까봐 딱 한 번 나가고 안 나갔다. 지금이야 사람들이 흉터에 대해 물어보면 귀찮은 듯이 대충 둘러대고 넘어가지만, 최근까지만 해도 나는 사람들을 속이고 산다는 것에 묘한 죄책감을 항상 지니고 살았다. 관심 받으려고 참 별 짓을 다 했었다. 백팩에 라디오헤드나 뻐큐하는 엽서 사진을 바느질해서 넣어 다니거나, 매닉 스트리트 프리쳐스의 기타리스트가 팔뚝에 자해한 사진을 자랑스럽게 붙이고 다녔다. 또 당시엔 거의 시도되지 않던 반삭에 수박 모양의 스크래치를 넣고 학교에 등교하다가 형들에게 맞기도 하고, 어느 날은 스님처럼 빡빡 밀고 면도까지 하고 다니다가, 손톱에 검은 매니큐어를 바르기도 하고... 더 어린 시절엔 한 여름에 한 겨울 옷을 입고 등교하기도 하고, 어떤 날은 엉덩이에 시퍼렇게 멍들도록 맞은 게 분해서 하루 종일 엉덩이에 베개를 넣고 다닌 적도 있다. 영작을 해오라 길래 영어 선생님 가슴은 매우 크다, 담임 선생님 꼬추는 거대하다 이런 문장을 써서 발표했다가 교실 앞에서 뒤까지 질질 끌려가며 얻어맞기도 했다. 보통 성적이 좀 나오는 애들은 그렇게 심하게 안 때리는데, 나는 매 번 격투기 하듯 여러 번 얻어 터졌다. 그래도 좀 웃기는 애, 특이한 애로 취급 받기 위해서 비인간적으로 두들겨 맞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윤리시간이었나 어떤 날은 교탁 위에 내 가방만 탈탈 털어 소지품 검사를 하더니, 내가 쓴 시들을 학생들 앞에서 읊는 바람에 비웃음을 당했던 적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분명 화가 나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그땐 화도 나지 않았다. 그냥 너무 창피하고, 한편으론 그래도 저 사람이 내게 관심을 가져준다는 것에 고맙기도 했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 선생은 고딩 교과서 수준의 변증법이 뭔지, 실존이 뭔지도 설명 못하던 사람이었다. 대학 시절 공부할 때부터 이해가 안 되서 지금도 설명을 못하겠다나? 언젠가 상담 시간에 사람이 뜻대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어차피 죽을 텐데 어디서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아야 하냐고 내가 물었을 때, 그 선생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2. 싸움
나는 운이 나쁘게도 인천항 바로 앞에 위치한 학교로 배정을 받고 통학을 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항구 근처는 항만 노동자나 관련업 종사자들의 자녀들로 이루어진 하층 계급들이 학군을 형성한다. 바닷바람이 많이 불고, 시멘트 공장, 비료공장 같은 산업시설들이 인근에 위치해있고 화물차들도 쌩쌩 달려서 먼지도 많다. 물론 원래 남중 남고가 난폭한 장소이기도 하다.
어쨌든 나는 교실 내부 폭력의 위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스스로를 캐릭터화하는 방법을 채득하게 되었다. 학교 선생들에게 자주 호명되고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지만 동시에 어느 정도 학업 성취도를 이루면 아이들 사이에서 천재나 괴짜에 대한 것과 비슷한 경외감 같은 게 발생된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이 경우에 폭력에서 제외될 수 있다. 씨름부, 권투부, 야구부 같은 꼴통 친구들이 우습게 보는 부류는 조용하고 공부 못하는 놈들이었다. 스파링 한답시고 맨날 붙잡아다 두들겨 패고, 빠떼루 연습한다고 매일 폐교실에서 뒤집어 내팽개치며 사람을 인형 놀 듯 놀았다. 여자 선생님이 가르치는 음악시간에는 선생님을 보며 책상 아래에서 대딸 같은 것도 시키고 했다. 나는 그렇게 당하는 아이들의 범주에 내가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겼다. 만연하는 폭력의 공포로부터 스스로 방어하기 위하여 타인과 구별되는 정체성을 구축했다고 해석하는 건 과장일까? 이 조작된 정체성으로 나를 인정해주고, 동시에 자신들의 폭력으로 배제시키는 놈들 역시 그 힘쎈 놈들이었으니, 결국 내 유년기의 정체성은 폭력에 의해 규정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면서 동시에 내겐 폭력적인 것에 대한 갈망 같은 것도 생겨났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라는 인간을 만들어주는 주체가 교실에서 가장 권위적인 힘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3. 목격
자해는 주체의 공동에 대한 저항행위였다. 나의 경우에 폭력적인 것을 타자로 상정해두고 여기 종속됨과 동시에 탈출하기를 추구하였던 것(‘즉 일진에게 때리면 안 되는 애’로 인정받기 위해 행했던 일련의 우스운 행동들)이 첫 번째 자학이었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경험하는 남성성이라는 것은 위계라는 것은 굴종과 좌절로 이루어진 수직의 구조였다. 타자에 대한 지배의 외연 속에 또 다른 타자에 대한 좌절을 내재하여야만 가능한 구조이다. 폭력이란 이렇듯 한 주체에게 양가적 분열의 상태를 지속시킴을 통하여 균열을 유발한다. 궁극적으로 가장 꼭대기의 단 한 사람만을 위한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그리고 두 번째. 자해를 주체의 공동이 커다랗게 엄습해왔던 순간을, 자신이 뿌리 채 뽑혀버린 순간에 느꼈던 공포에 대한 진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 개인의 모든 삶은 대부분 타자의 영역 속에 있지 않은가. 스스로 진정 살아있다고 느끼는 순간 또한 타자의 욕망을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역설적으로 타자에 종속되는 순간들이었다. 예술을 통해 주체되기를 배우는 미대에서조차 누가 작업을 잘하나 못하나, 누가 전시를 하느냐 못하느냐로 묘한 경쟁의 구도가 발생한다. 세상은 이유 모를 당위성만 존재하는 곳, 이것은 수행 혹은 도달해야할 진리이고, 진리가 아닌 모든 것들은 비천한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그 비천함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는 살아가며 천천히, 조금씩, 별 볼일 없는 평범한 사람이 되어갔는데, 이 무너지는 과정을 견디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몸에 상처를 내서라도 지워지는 것에 대하여 저항하고자 했다. 자해는 어쩌면 최초의 반항이었다. 스스로 지워지는 것에 대한 불은은 주체의 결핍에서 기인한다. 아마도 나는 내부의 엄청 커다란 공동을 목격했을지도 모른다.
3학년 스튜디오 & 예비심사를 위해 적었던 글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