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는 때가 너무 많다.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내가 그림을 그려야 하는 이유, 남의 그림을 봐야하는 이유를 찾은 거 같았는데... 다시 작업 시작하려고 자리에 앉으니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생각하는 거랑 손이 움직이는 건 다른 일인가 싶다. 일하고 욕 쳐먹고 맘에도 없는 사과하며, 인간을 혐오하다보면 전보다 점점 더 멍청해지기만 하는 기분.
나는 지난 몇몇 연인에게 내 존재의 실제 가치보다도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 사실을 한참 뒤에야 깨달았기 때문에, 이제는 무얼 받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진다. 되갚지 못할까봐. 갚지 못한 이야기는 끝이 나질 않는다. 사랑은 미안한 사람이 패배하는 일인 것 같고, 나는 매일 매일 지는 사람이 되었다.
가끔은 내가 가득 차 있을 때도 있었는데, 그때는 내가 무언가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려 벽에 거는 일도 그랬으면 좋겠다. 선물하듯이. 그림이라는 게 막연히 세상에 꺼내 보이면 되는 행위인지, 혹은 여전히 내가 받은 무언가를 갚아 나가는 행위인지, 아직 명확한 기준이 서지 않는다. 나는 분명 갚아야 할 것들을 생각하며 작업을 만든다. 그리고 사실 교환과 증여야말로 내 삶을 추동하는 힘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의 것을 누가 원하기는 하는 걸까? 나는 처음부터 한 사람을 위한 그림을 그리고 싶었으니까.
(이 의심은 호출 빈도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비단 나뿐만 아닌 대부분의 작가들이 다른 작가들보다 활발하게 활동하지 못하고 있음을, 인스타그램을 통해 비교하며 좌절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한동안 계정을 비활성화 시켰다.)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내가, 잘난 사람들 한가득인 이 학교 계간지에 작가로 소개 되었다. 십년 전쯤 함께 재학중이던 후배님들 무려 세 분이나 비슷한 시기에 등단하게 된 상황에서, 고작 문학 입문반이고 미술에도 변변한 이력이 없는 내가, 심지어 어디 아트 페어 나가서 제대로 그림 한 번 팔아본 적 없는 보잘 것 없는 내가, 여전히 구렁텅이에서 스스로를 미워하고만 있는 내가 지면을 차지한다는게 부끄럽다. 그러나 편집자님은 나에게서 나조차 모르는 무언가를 보았기 때문에 섭외한 것일 거라 믿기로 했다. 다시 말해, 내게 부재하는 믿음을 다른 사람을 통해 확인하고, 그 믿음을 나 또한 믿어본다는 거다. 믿음도 대출이 된다고 생각하는 수밖에.
미래의 나에게 이 상환을 맡겨본다. 누가 이익을 보는 건진 모르겠지만 이것도 일종의 공매수, 공매도가 아닐지.
(받는게 어렵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기획자이자 작가인 조솔빈님의 각주 버전 새 책을 받고 말겠다는 결심은 변치 않음)
20250903
<지금 여기의 마음으로부터>
karts magazine 55
작성중
<지금 여기의 마음으로부터>
인터뷰어 주은호
인터뷰이 이준용
촬영 이산하
편집 임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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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림과 습작을 같이 놓음으로써 발생하는 효과?
a: 이전에는 기호와 의미가 딱 붙어야만 작품이 명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꾸 무언가를 정리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시 읽기와 쓰기 강의를 들으면서부터, 그리고 처음 해보는 유화를 진행하면서 두 가지 장르는 특성상 어떤 분명한 공백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고 느꼈습니다. 보통의 전시 서문은 작업 기저의 구조를 밝히기 위해 인문학적 이론들을 가져와서 설명하기 때문에 딱딱하기 마련이고, 그것이 서문의 존재 의의이기도 합니다. 감상에 있어 다른 상상력이 침투할 경로를 소거하는 대신, 하나의 명백한 경로를 확장하여 진입할 수 있게 하는 구실을 하는 거죠.
반면 제가 쓴 습작들은 이미지 혹은 의미와 딱 붙어있지 않고 느슨하게 붙어 호흡합니다. 돌아나가기 때문에 볼 수 있는 지점들이 분명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고저차와 지형지물을 무시한 최단거리 직선 경로에 대해서만 고민해왔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껏 실패해왔다고 봅니다. 앞으로는 보다 많이 돌아서 나가기도 하고, 그러다 더 성실하게 길을 잃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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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은지.
a:지지님 말씀처럼 저 또한 현대 미술계를 이끌며 값 비싼 그림을 그리고 파는 소위 스타 작가가 될 순 없다는 걸 압니다.
다만 저는 사람들이 제 전시장에 오래 있는게 좋은데요. 그래서 매 전시마다 의자와 책상을 가져다 두었어요. 쉽게 소비되는 작업이 아닌, 곁에 머물고 싶고 오래 들여다보고 싶은 작업을 만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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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
a: 작업하면서 자기 자신을 너무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자기 괴로움을 작업으로 위로받을 생각 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봉합되지 않는 괴로움을 거즈로 덮을 줄도 알아야지, 아프다고 계속 들여다보면 피만 철철 난다. 그리고 다치지 않아야 작업도 할 수 있다. 학생들 간혹 보면 너무 위험하게 작업해서 걱정됩니다. 부디 몸 생각하면서 작업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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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녕하세요, 작가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바쁘신 와중에 인터뷰 수락해주셔서 감사해요. 저도 작가님의 개인전 잘 보고 왔습니다. 전시가 종료된 이후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지 궁금해요. 최근 일상에 관해 이야기해주실 수 있을까요?
: 학교 일도 그렇고 한동안 밀린 업무가 너무 많아서... 계속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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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작가님의 이번 개인전 《시 창작 입문반》은 제목이 재미있고 인상적이었어요. 문학과 미술이 교차하는 가운데, 저 개인적으로는 ‘떠나보내다’라는 동사와 ‘첫 번째 마음’이라는 명사가 교차하는 지점처럼 느껴졌습니다. 이 지점의 주변부를 머뭇거리며 그림을 수정하고 서문을 다시금 작성하고, 전시장에 걸린 작품의 순서를 바꾸는 과정이 마지막 날까지 이어졌는데요. 이러한 과정이, 전시 전체의 호흡이나 정서에 어떠한 작용, 혹은 흐름을 가져다주었다고 느끼셨는지 궁금합니다.
: 전시 첫날엔 정말 밥도 안넘어갔습니다. 제가 오랜 기간 종이 드로잉 작업만 하다가 이번에 페인팅과 글을 처음 전시했거든요. 전시장에 걸어보고 놓아 보니 너무 창피했습니다. 도저히 그 상태로 한달동안 버틸 자신이 없어서 고치기 시작한거예요.
작품 수정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요,
원래 시 책자 맨 처음에 어떤 에세이가 있었습니다. 괴로움의 근원을 파고들다가 가족에 대한 이야기에 도달하며 나는 앞으로 어떤 사람도 사랑할 수 없을 거라는 자책과 비관을 적은 글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적어놓고 보니 사람들이 그 글을 읽는게 너무 싫었어요. 모르는 사람들에게 저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아서요.
김지원 교수님이 방문하셔서 제 에세이를 읽어보시더니, 네 글 읽기 싫다고, 니 힘든 얘기 이제 그만 알고 싶다는 내용의 메모를 보내주셨어요. 글이 별로라고 하니까 기분이 안좋아야 하는데, 오히려 그 조언을 들으니 해방된 기분이었어요. 남도 싫고 나도 싫으면 안꺼내면 그만인데, 왜 여태껏 계속 하기 싫은걸 해왔을까? 이젠 내 얘기를 사람들에게 팔지 않아도 되겠구나.
제가 괴로움을 작업의 동력으로 이용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그 글을 지우는게 저에게 상징적인 치료였던 것 같아요. 이제는 나를 미워하지 않고도 작업을 계속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구요. 사실 이건 아주 기초적인 거거든요. 미술원 1학년 파운데이션 과정중에 4d라는 수업이 있습니다. 자기의 트라우마나 걱정거리를 물질로 형상화 하여 날려보내는 상징적인 수업이었습니다. 수업 종강 날에 미술원 옥상에서 한명씩 날리면서 마무리하거든요. 저는 그 수업을 이제서야 이수한 것 같습니다.
미술 작가는 특정한 모양의 창문일 뿐이지 내 멋대로 보이는 풍경을 바꿀 순 없는 거라고 봅니다.
그래서 각자 할 수 있는 작업의 종류가 정해져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내가 다른 작가처럼 할 수 없는 나만의 고유한 것이 있고, 이것이 일종의 타자성을 구축한다고 봅니다. 예술의 신비로운 지점이기도 하고요. 나의 창문을 타인과 공유하는 것이지, 그 창문을 통해 나를 봐달라는게 아닌데, 저학년때는 흔히 착각하곤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 조언을 들은 그날 그 글을 지워버리고, 한동안 글 없이 전시를 하다가 새 글을 써서 책자를 다시 만들었어요.
만약에 첫 날과 마지막날이 같은 내용의 전시였다면, 저는 정말 창피한 전시를 만들었을테고, 여전히 헤매고 있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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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드로잉이나 유화 작업을 하실 때, 작업에 착수하게 되는 계기가 있다면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더불어 장면과 주제, 소재를 어떻게 정하시는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 다룰지 결정하는 과정에 관해서도 이야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이 전시는 드물게 연락하는, 한 큐레이터 친구와의 대화에서 힌트를 얻은게 많아요. 이번에는 새를 많이 그렸는데요, 사실 저는 새를 공룡의 한 종류로만 생각하고 있었지 조형적으로 접근할 생각은 하지 못했거든요. 제 그림 중에 날개 달린 꽃다발 드로잉이 있었는데요. 구두 신고 가방 무거운 날엔 이렇게 날아가고 싶다는 그 친구의 이야기가 생각나서 <집에 가는 길>이라는 소품을 그리기도 했어요. 제작하는 입장에서 작업 속으로 이입하는게 쉽지 않기 때문에 이런 감상들을 주의 깊게 듣곤 합니다.
저에겐 일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새로움의 기회는 거의 없어요. 일하고 작업하고 집에 가는 루틴의 연속이기 때문에요. 연애할 땐 이런 저런 시시콜콜한 얘기를 많이 하게 되니까 그런 것들이 은연중에 반영돼요. 내가 모르는 세계를 알아간다는 건 행복한 일이니까요. 사생활을 그대로 가져다 쓴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는데요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저는 개인적 경험을 직접적으로 그리지 않거든요.
나와 다른 방식으로 이해되는 세상을 바라볼 수 있고 그 관점에서 작업을 만들 수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일입니다. 그래서 보통 저는 연애를 하거나 사람을 자주 만나던 시기의 작업들이 더 긍정적이었던 것 같아요.
소재를 어떻게 다룰 수 있는지에 대한 예시를 들어봅니다. 제가 예전에 알리에서 저렴한 실리콘 냄비 손잡이를 새로 샀어요. 냄비 손잡이에 관심을 가질 리가 없잖아요. 그래서 어디 짱박아뒀어요. 근데 당시 애인이었던 친구가 그걸 보더니 여기다가 조만간 눈을 두 개 그려넣을거래요. 며칠 뒤에 눈 그려 넣은 걸 보여줬는데 참 웃기더라고요. 냄비 손잡이가 악어 모양이 되었는데요. 저는 관심도 없던 물건이었는데 처음부터 거기다가 눈을 그려넣을 생각을 하고 있다는게 신기했어요. 세상에 뭐 이렇게 귀여운 사람이 다 있나 싶었어요. 그 뒤로 그 손잡이를 보면 계속 그 사람이 생각나요. 한 사람은 여러 성격의 복합체라서 좋은 점 싫은 점이 교차하지만, 그 실리콘 냄비 손잡이에는 귀엽고 천진한 한 사람만 존재하고 있어요.
작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재현되는 대상에 여러가지 속성이 존재하겠지만 특정한 방식으로 그것들을 보여주려 해요. 그것이 레토릭의 기술이고, 아서 단토가 일상적인 것의 변용에서 말한 예술에서의 말하기 방식인거지요. 하나의 그림은 개별적으론 하나의 말하기 단위 이지만, 이것들이 모여 있을 때 드러나는 삶의 다양한 양상 혹은 동시대 시각문화의 특질이 드러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아직은 큰 그림보다 작은 그림이, 작은 그림이 모여 있는 풍경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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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작가님이 이야기하신 ‘모르는 것을 사랑하는 용기’는 프레임과 유화, 그리고 언어의 경계에서 걷고 또 걸으며 사랑으로 기울고자 하는 마음으로 느껴졌습니다. 태동하는 마음은, 여러 겹 덧칠된 흔적과 크랙, 질감으로 표현된 것 같은데요. 여기에 쌓인 시간과 과정은 작가님이 무언가를 기꺼이 견디고 기다린 기록처럼 여겨집니다. 이러한 머묾의 순간이 작가님의 실제 붓질이나 색 선택, 내러티브, 디테일, 그리고 텍스트의 발화에 어떠한 영향을 가져다 주었는지 궁금합니다.
: 얇고 가벼운 그림이 저의 취향인데요, 손이 따라가질 못해요. 아직은 손이 머리의 종노릇을 합니다. 그래서 수정을 거듭하다보면 어느 순간부터 제가 추구하는 최초의 미적 기준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림도 시와 마찬가지로 랜덤 액세스가 가능한 장르잖아요? 그래서 첫 인상이 굉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태생적으로 세련됨이랑 거리가 먼 사람이라서, 첫 눈에 반할 수 있는 그림을 아직은 만들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계속 손을 대는 것입니다. 글쓰기도 끝을 생각하지 않고 시작하는데, 그림도 그런 것 같아요. 예술 작품이라는게 창작자의 손을 떠났다고 모든 이야기가 완결되는게 아님을 압니다. 완성이라는 것을 보는 사람들이 시작할 수 있는 지점을 확보했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작업들을 마지못해 놓아주고 있습니다.
시 읽기 수업을 들으면서 이런 점을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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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림이나 서문을 계속 고치고 다시 쓴다는 것은 꾸준히 들여다보고, 끈질기게 생각한다는 의미인 것 같기도 합니다. 작가님은 이러한 과정을 일부러 지연시키는 편이신가요?
: 주5일 9-6 몸이 회사에 묶여있으니 작업할 시간이 정말 많이 부족해요. 졸면서 작업할 때도 있어요. 졸리니까 대충 그리게 되더라고요. 파레트도 대충 닦아서 탁해지고요. 결국 그런 그림은 못쓰게 되요. 그래서 한 작업을 빨리 끝낸다는 건 절대적으로 좋은 일입니다. 작업량이 늘어나는 거니까요. 작업을 빠르게 마무리하면 당연이 좋겠지만 그럴 수 없으니 계속 다듬는 것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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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작가님의 개인전을 감상하고 서문과 시 습작을 읽는 동안, 프레임과 텍스트 속 존재들이 바깥으로 나아가려는 듯한 기척을 느꼈습니다. 작가님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사람이나 동물 혹은 그밖의 존재에 관해 어떻게 상상하고 계시는지 이야기해주실 수 있을까요?
: 소재를 그림으로 옮길 때는 여러 판단의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일단 작업을 시작하면 작업 속 대상과 상황에 이입할 수 없습니다. 제 눈을 벗어났을 때의 작업물이 어떤식으로 보일지 객관적인 태도를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 뿐만 아니라 아마 제작하는 분들은 다 그럴 거예요. 대상화의 문제 때문에 특히 더 그래요. 매우 어려운 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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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전시장은 정적인 고요와 내적인 동력이 강하게 작동하는 것 같았습니다. 작가님은 이러한 공간의 상태를 어떻게 느끼셨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 6번과 비슷한 대답인데요.
한달의 전시가 철수까지 5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냥 애초에 흰 벽이 있었고 거기 몇 달간의 노력이 담긴 그림이 잠시 걸려 있던 거지요. 팔리지 않은 그림은 창고로 돌아가거나 버려지게 되고요.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삶의 모든 것이 허무해집니다. 저는 기본값이 냉소적인 사람이라 스스로 최면을 걸어야 합니다. 그래서 종종 예술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허무함을 극복하고 있는걸까요? 궁금합니다. 전시장은 가능성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누군가 임대료와 관리비를 내는 공간이기도 하고 견뎌야 하는 혹독한 공간이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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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작가님의 작품 속 세계와 공간의 느낌은 작업 과정 중에 자연스럽게 드러난 결과인지 궁금합니다.
: 김연덕 시인 커리큘럼에서 시 속에서는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설명이 재밌었습니다. 글자 몇 개의 조합으로 무한히 자유로울 수 있다는게요. 반면 저는 지금까지 일상적인 장소와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작업해왔습니다. 아무도 강제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그렇게 해야한다고 믿었어요. 왜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이 전시에서는 공간 보다 대상에 집중했지만, 앞으로는 가능한 한 멀리 가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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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작가님은 올해 초 시에 관한 강의를 수강하며 시를 읽고 쓰게 되었다고 하셨는데요. 시를 배우며 겪은 감각들이, 그림 작업의 과정에서 어떻게 작용했나요?
: 학생때는 아포리즘류의 글을 싫어했습니다. 문인들이 멋부리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명확하지 않은 시를 좋아 할리가 없었지요. 같은 이유로 미술이 싫기도 했고요. 제 기준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것에 시간을 투자하는 일에 인색했던 편인데요, 그래서 사람을 만나는 것도 지속적으로 실패했던 것 같습니다.
이희우 평론가와 김연덕 시인의 수업을 들으며 두가지의 결론을 도출했습니다. 공교롭게도 두 분 다 우리 학교 출신이네요. 사실 학생때 진작 깨달았어야 하는 내용이긴 한데요. 제가 입학도 많이 늦었고 배움 자체가 늦은 편입니다.
우선 매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명확하게 할 말이 정해져 있다면 뭐하러 시를 쓰냐는 얘기를 무한화서에서 읽은 것 같아요. 그럴거면 논문을 쓰고 에세이를 쓰고 설명서를 쓰면 되니까요. 그림도 그래요. 명확히 할 말이 있다면 디자인을 하고 일러스트를 만지면 되는 일인데. 시와 마찬가지로 그림이란건 애초에 불명확할 수 밖에 없다는 거고, 4번 질문에 말씀드렸듯이, 그 불명확성에서부터 예술이 시작될 수 있다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모든게 명백하다면 누가 그걸 들여다보겠어요. 전자제품 설명서처럼 도구적으로 활용될 뿐이지요.
다른 하나는 작업의 존재론적 확신인데요. 앞에서 말했듯이 예술 작품이란게 특정한 모양의 창문이라는 건데요. 이를 통해 타인의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시를 쓸 수 없듯이 그림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타인의 눈에 비춰진 세상을 통해 낯설음을 경험해보는건데요.
효율성이 주요 덕목이자 가치인 시대이기 때문에 동일성의 시도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잖아요? 어린이집 만드는 돈보다 벌금 내는게 저렴하니까 기꺼이 벌금을 내는 기업도 있고, 강북구의 우리 집값이란게 딱히 갈 일도 없는 강남 접근성에 의해 결정되듯이요. 시대적 비극이 일률적 기준을 제시하고, 동일성을 강제하고 차이를 구조적으로 배제해나가면서 윤리는 눈녹듯 해체됩니다. 이것이 결국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데, 우리는 그게 불행하다는 것조차 모릅니다. 저또한 불행한 상태이고요. 다소 뻔한 답변이긴 하지만 예술이, 글과 그림이 이러한 불행과, 그로 인해 유발되는 피로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감각을 제공한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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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시를 읽고 쓰며 느낀 감각이, 캔버스에서 어떠한 리듬과 이미지로 나타났는지도 궁금합니다.
: 8번에 공간에 대한 이야기와도 연관되는데요. 저는 늘 현실 기반의 이미지를 만들어왔는데,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겠더라고요. 그림 속에서 무엇이든 가능한 걸 왜 스스로 제약하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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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작가님이 시 창작 수업에서 쓴 습작과 이번 개인전의 작품을 나란히 놓고 보고 있으면, 각각의 물성이 서로를 비추거나 흔드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자면 눈물 사람과 멍든 물, 졸업과 집에 가는 길, 시 창작 입문 반과 금간 꽃병 등등)
작가님이 시를 쓰던 도중 이미지가 떠올라 그림으로 번져 나가거나 또는 캔버스 위를 오가던 붓질을 멈춘 채 단어를 찾게 된 경험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작가님의 시와 그림 사이에 오가는 영향이 각 매체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다 준 적이 있다면, 그 순간을 이야기해주실 수 있을까요?
: 글의 이미지는 애초에 머리 속에서만 구축되는 비물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그림이라는 물질로 전환되는 과정이 자연스러운 것 같아요. 틈이 많아서 상상이 자유롭기도 하고요. 반면 그림에서 글로 가는 건 쉽지 않은데, 그래서 비평가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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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작가님의 개인전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이어지던 작업 중, 서문에서 말씀해주신 ‘시적 태도’와 ‘최소한의 머뭇거림에서 비롯되는 부재를 현전하게 만드는 상상력’이 머물던 순간에 대해 구체적으로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예를 들자면 잠시 붓을 멈추고 가만히 서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던 순간, 캔버스 사이즈를 변경하고 제반 조건을 재설정하던 순간, 티타늄 화이트와 징크 화이트를 고르던 순간, 말로 이끌어낼 수 없는 것을 여백과 덧칠로 남긴 선택의 순간, 붓을 내려놓고 그림의 건조를 기다리던 시간등등)
: 시적 태도라는 것이 결국 세계의 사물성을 짚어본다는 측면에서 미술품 제작의 기본 원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제가 등단한 시인도 아닌데요 시적 태도에 대해 논할 만큼 시에 대해 고민을 해본 것도 아니라 말씀드리기가 사실 좀 조심스럽습니다.
저는 드로잉을 오래 해왔습니다. 드로잉은 얇은 매체이고, 물리적으로 무언가를 더 쌓는게 물가능합니다. 회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회화는 마르는 시간을 기다려야하고, 그래야만 그 위에 무언가를 덮어낼 수 있습니다. 드로잉은 같은 속도를 유지할 수 있지만, 페인팅은 그럴 수가 없기 때문에 악셀도 밝고 브레이크도 밟아가며 진행됩니다. 그러다보면 의도적이든 아니든 어느 순간부터 좌초되는 지점이 분명 발생합니다. 페인팅은 애초에 완결된 경로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좌초된 지점에서부터 진짜 그림이 시작된 듯 합니다.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일단 내비를 끄고 당장 눈 앞의의 이 그림이 무엇이 되는게 나을지 고민하게 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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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작가님의 전시회가 진행되던 시간과 수정이 거듭되던 서문은 피로했던 나’로부터의 전환이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작가님의 삶에서 단순한 기분 전환이 아닌 감각, 생활 리듬, 작업의 루틴을 가져왔을 것 같기도 한데요. 미술원에서 일하는 직장인이자 작업을 지속하는 예술가로서 작가님이 언제 어떻게 실제적인 변화를 감지했는지 궁금합니다. 감지했던 첫 순간, 그리고 그 감각이 이번 개인전의 작품이나 서문으로 이어졌는지도 여쭤보고 싶습니다.
: 부끄럽게도 일한다는 핑계로 졸업 후 지금까지 작업실 없이 작업을 해왔는데요. 이번에는 집에 방 한칸을 비우고 타일을 깔고 나무가벽을 설치하고 작업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작업할 환경을 조성했어요. 새벽에 일어나서 작업하고 유연근무 출퇴근을 했는데 결국에는 시간이 부족하고, 그래서 휴가를 쓰고 며칠 작업을 했는데 업무 때문에 제대로 집중도 안되고 해서, 전시 임박해서는 학교 근처 친구의 작업실 창고를 빌렸습니다. 정말 좁고 어둡고 에어컨도 없는 곳에서 땀범벅으로 작업했어요. 아마 계속 이런 식으로 작업할 순 없을거예요...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전에는 제게 작업 시간이 부족하고, 몸이 아프고, 헤어져서 너무 괴롭고... 이런 것들을 관람객들이 알아주길 바랐지만. 이제 그럴 수 없다는 것도 알고, 더 이상 그러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냥 공들인만큼 작업에도 그런 면이 드러나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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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퇴근 후에 그림을 그리거나 시를 쓰는 작업 시간 외에, 일상을 환기하는 여가가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혹은 작업이 잘 풀리지 않아 막막하거나 기분 전환을 위해 어떤 시간을 보내려 노력하시는지 궁금합니다.
: 요즘엔 보통 손톱을 깎습니다. 손톱깎이가 장소마다 있어요 사무실, 식탁, 침실, 작업실, 가방속에도 하나. 손톱을 깎으면 정말 개운해집니다. 지난 몇 년동안 폭음하면서 종일 스포츠만 보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걸 끊어버리니 빈 시간에 무얼 해야 할지 사실 잘 모르겠어요. 의식적으로라도 책을 읽으려고 합니다. 친구들이 이걸 보고 있다면, 저에게 이제 잘 드는 손톱깎이를 선물해주면 좋겠네요. 술을 끊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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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작가님의 <시 창작 입문반> 전시를 감상하고, 서문과 시 습작들을 읽으면서 떠오른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송별회입니다. 나의 ‘모름’을 그 자체로 두고 응시하고 서성이며, 한 손으로 붓과 펜을 들고선 작가님이 작별과 시도를 번갈아 건네는 시간. 그 모습은 구석진 뒤란에서 마주친, 불가해한 가능성이었습니다.
이 또한 작가님이 서문에 말씀하신 것처럼 기이한 환대의 풍경인 것 같습니다. 작가님은 전시가 종료된 후 8월 5일에 ‘이제는 그림으로만 말하고자 한다’고 하셨는데요. 그렇다면 ‘송별회’처럼 느껴졌던 이번 전시의 시간과 감각들을 기반으로, 향후 어떤 작업과 활동을 기약하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 이 전시도 결국 이젤 앞에 처음 서는 나, 시를 처음 배우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으니까요. 처음이란 건 한 번 뿐인데, 저는 이 처음을 다섯 번째 개인전까지 유예해온 것 같고, 그 과정에서 많은 변화의 기회를 놓쳤습니다. 다섯 번의 전시를 합쳐서 한 번의 전시라고 생각하려 합니다.
앞으로는 그림과 글이 홀로 설 수 있는 전시를 만들고 싶습니다. 작업 바깥에서 고군분투하고 번민하는 저같은 캐릭터가 사라져도 괜찮은 단단한 전시를요. 예술사 졸업한지 올해로 10년차인데요. 저는 이제서야 진짜 시작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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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18
저곳의 날씨를 상상하며
냉소가 나의 힘이었다. 삶을 대하는 태도도, 그림을 대하는 태도도 그랬다.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우울증 버전이라고 해야 하나. 회화라는 오래된 형식, 천위에 발린 안료 덩어리의 환영에서 대체 무슨 의미를 찾으려 하는 건지, 이런 생각을 떨치지 못하면서도, 한편으론 예술대학을 졸업하고, 퇴근 후 시간을 쪼개 작업을 만들어 전시장 앞을 기웃거리는 모순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나름의 타협을 위해, 예술은 일종의 스포츠(게임)라는 암시를 했다. 잔디밭에 선 몇 개 긋고, 발로만 공을 차자고 룰을 정하고, 그렇게 공을 차는 기이한 일에 수 억 명의 사람들이 몰두하듯이, 미술도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표백된 공간에 낯선 이미지를 걸어 두고 붓질이 이렇고 저렇고, 레퍼런스를 어느 미술 사조에서 어느 대중문화에서 가져왔네 하면서 즐기는 돈 있는 사람들의 지적 유희라고. 내가 이베이에서 장난감 자동차를 수집했듯, 그림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림을 사고파는 사람도 있는 거라고. 무언가 좋아하기 위해 딱히 이유가 필요한 게 아니라고. 그러나 이 이너 서클에 어울리는 영리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한 뒤론 미술이 아예 싫어지기도 했다.
12년 전, 김지원 선생님의 회화 수업에 미완성 과제물을 제출한 이후로 캔버스 그리기를 아예 포기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캔버스 그림으로만 이루어진 전시를 만들게 되었다. 올해 초 이희우 문학 비평가와 김연덕 시인의 시 수업을 듣게 된 뒤로 얻게 된 나름의 확신 때문이다.
앞의 수업에선, 하나의 텍스트가 실은 얼마나 정교하게 구축되어 있는지, 총기 수입을 하듯 문장을 하나씩 분해해서 꺼내볼 수 있었다. 길지 않은 글 속에 있는 층위와 그 구조에 감탄했다.
뒤의 수업에서 나는 물어봤다. 시인들은 대체 왜 이렇게 이해하기 어렵게 시를 쓰는 거냐고.
시인이 왜 그렇게 쓸 수밖에 없었는지를 고민해 보라는 답변을 받았다.
이 대답을 듣고 많은 부분이 명쾌해졌다. 작업이 팔리든 안 팔리든, 미술계에서 호명이 되든 되지 않든, 모든 미술가에겐 자신의 작업을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추동력이 있다고 본다. 나의 언어가 그렇듯, 타자의 언어 또한 그런 식으로 구축되기 때문이다. 하나의 그림은 하나의 인격이 이룩한 이미지적 집합체라는 사실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생각하면 앞으로도 나는 계속 그림을, 안료 덩어리의 환영을 좋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이 동시대 미술로 진입하는 적절한 방식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태껏 이 방식 말고는 다른 방식을 찾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도 메이저 전시 태반의 글들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건지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은 동시대 미술의 난해함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역할이 있는 거니까. 다만, 미술에 접근하는 태도 자체가 중심부의 것과 다른 종류여도 유효할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싶고, 증명하고 싶다.
나의 작업은 이 전시를 기점으로 이전의 종이 드로잉 연작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더 이상 과거의 괴로움을 길어 그림에 쏟지 않게 되었다. 내 이야기를 적는 것도 이 전시가 마지막이다. 앞으로는 붓으로, 물감으로, 그림으로만 말을 하는 사람이 되려 한다.
차도하 시인의 시집 맨 마지막에 수록된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내가 아는 확신의 형태에 관해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 ...(중략)
언니는 그네를 너무 세게 밀었다.
무서웠는데 정말 무서웠는데
무섭지 않은 척 하늘을 바라보았고
멀지 않은 곳이 이미 맑았다.
날씨의 경계가 보였다.
그때부터 이곳이 흐려도 맑은 저곳을
이곳이 맑아도 흐린 저곳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 ...(중략)
언니는 그네를 너무 세게 밀었다.
무서웠는데 정말 무서웠는데
무섭지 않은 척 하늘을 바라보았고
멀지 않은 곳이 이미 맑았다.
날씨의 경계가 보였다.
그때부터 이곳이 흐려도 맑은 저곳을
이곳이 맑아도 흐린 저곳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여태껏 뒤에서 누가 미는 줄도 모르고 그네 위에 올랐고, 높이 솟은 그네의 높이가 두려워서 오직 내려가기만을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이제는 이곳과 저곳을 가르는 경계로써 표면을 볼 수 있다.
이곳과 저곳의 날씨를, 그 상상적 가능성을 사랑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이곳과 저곳의 날씨를, 그 상상적 가능성을 사랑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2025.08.05
귀여워도 소용없어 (언어 없는 세계에서) 이준용 개인전
Cuteness is useless (In the language-less world)
2024. 7.27- 8.18 배렴가옥 창작실험실 입주 보고전
J: 최근에 올린 그림 잘 봤습니다. 귀엽더라고요
나: 감사합니다. 근데 귀여워도 (아직은) 소용없어요.
이번 전시의 가제였던 '너클볼 연습'과 미리 적어 둔 서문이 너무 재미없어서 고민하고 있던 차에, 최근 만난 친구 J와의 대화가 문득 떠올랐다. 귀여움에 대한 논의는 사회 전반의 각 분야에서 이미 널리 진행되어 왔으며, 나는 이것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이 전시에선 귀여움이 무엇인지 정의 하려는 게 아니다. 따라서 ‘귀여움이 승리한다.’, ‘귀여움이 세상을 구한다.’ 따위의 팬시한 주장을 하려는 것도 아님을 미리 밝힌다. ‘귀여움’은 현상이고 ‘소용없음’은 판단이다. 이 판단에 방점을 찍고, 그동안 지나온 과정에 대한 고민을 적어보려 한다.
질문 1 : 나는 왜 귀여운 그림을(그림을 귀엽게) 그렸을까, 그리고 왜 귀여운 건 소용없다고 대답한 걸까?
1.1. 그림이 귀엽다는 것 : 마주한 이미지에 대한 첫인상. 관람자의 미적 기준에 의해 일정 부분 평가 완료된 상태. 특별한 거부감 없이 관람자의 뇌에 이미지가 각인됨.
2.1 소용없음의 사전적 의미 : 특별한 쓸모나 가치가 없다는 뜻.
2.2. 소용없음의 문맥적 의미 : 귀여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세상에 너무도 많다. 그 수많은 이미지 속에서 내가 만든 이미지가 굳이 존재해야 할 그 타당성에 대해 아직 확신이 없음. 이것이 동시대 미술이 맞긴 한걸까?
2.3. 소용없음을 창작자의 관점에서 : 현재의 매체와 작업방식으론 인지도를 쌓는다거나, 판매 증진에 있어 큰 전환이 되지 않을 것을 예측하고 있다.
: 이렇게 정리해 보니, 소용없다는 판단에는 적어도 두 종류의 좌절감이 내포된 것으로 보인다. 이 두 가지 좌절감의 사례를 해결하면 이미지의 무책임한 귀여움도 그 자체로 수용이 가능하여, 별도의 부차적 의심 없이 미학적으로 판별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2.3의 경우, 종이 그림과 드로잉이라는 매체적 한계에 대한 푸념이기 때문에 본 글에서는 다루지 않겠다. 그러면 2.2에 대한 논의만 남게 된다.
애초에 이번 작업을 통해 내가 진행하고 싶었던 건, 지난 작업을 관통해 온 정서적 호소와의 단절이었다. 특히 내가 무슨 미술계의 최수종도 아니고, 사랑 타령만 줄곧 해대는 사랑꾼의 그림으로 한정되어 독해되는 상황이 혐오스러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별도의 형식적 고려 없이 다량의 아이디어를 A3 용지에 가볍게 소모함에 따른 소재 고갈과 의욕 상실을 극복하기 위해 고안해 낸 나름의 내러티브 작법을 정리하여, 전시의 형식으로 한 번 펼쳐 보는 것이었다 (다시 한번 거듭 말하지만, 자전적 성격의 드로잉은 학부 졸업과 함께 종결했다). 따라서 내가 말한 ‘소용없음’이란 전시를 위해 사전 설계된 태도가 아니라,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마주한 난관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질문 2: 그렇다면 어떻게 작업 전반에 엄습하는 ‘소용없음’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을까.
: 내가 생각하는 해결 방안은 다음과 같다.
1. 현재 작업의 위치를 인지하고, 앞으로 도달하고 싶은 지점에 대해 명기한다
2. 작업으로 획득하려 하는 사회적 함의에 대해 규명한다
우선 전반적인 작업 과정과 이를 통해 의도하는 것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본다.
작업 과정 : 나는 내가 기억하는 것을 그린다. 여기서 기억은 개인으로서의 단순 경험을 말하는 게 아니고 인식론의 관점에서 인지하고 있는 어떤 대상, 아직 개념적으로 정립되지 않은 표상에 대한 것이다. 머릿속 대상을 그린다는 것은, 눈앞에 보이는 것을 응시하고 조응하여 대상을 최선의 형식으로 끄집어내는 페인터의 태도와 일정 부분 대치된다. 나는 담아둔 대상들을 조합하여 일상적 순간이나 형태를 구성한다. 이때 대상의 특수성이 제거된 개념을 이미지화하여 단일 레이어로, 가급적 인과관계의 합리성에 기반을 두되 약간의 틈을 둔 채 조립한다. 이를 통한 직관적이며 전형적인 서사 획득을 목표로 하며, 동시에 선형적 이미지 읽기의 지연을 시도한다. 더 간단히 말한다면 나는, 콩트에 비견되는 짧은 서사를 한 이미지 안에, 혹은 여러 이미지 전반에 걸쳐 성립시키고, 그것을 관람자가 독해하는 과정에서의 멈춤과 이탈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작업의 목표 : 이 전시는 내가 '기억하는 대상'을 평면 이미지로 번역하는 과정에 대한 형식 연구이다. 기억에 진입한 대상은 언어적 구획의 가공과 정제 과정을 거치며 표상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나는 붓으로 언어를 덜어내는 페인터가 될 수 없다. 언어를 가장 합당한 방식의 이미지로 번역하여, '언어 없는 세계'로 송부한다. 페인터가 리무버라면, 내 경우엔 번역가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추구하는 것은 개념 미술이 아니며, 이미지의 본질은 여전히 비언어적 자유로움에 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를(언어적 속성을) 극복하기 위한 장치로 내러티브의 ‘틈’을 설계해 왔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을 통해서 나는 아래와 같은 질문을 다시 작성할 수 있다.
질문 3: 내러티브의 ‘틈’을 통해 교차하는 공동의 창문은 어떤 모양이며, 이 창문이 조망하는 곳은 어디인가
: 대상들이 서로 엮여 어떤 이야기가 되는 동시에 그것들이 조응하지 못하고 비문이 되는 순간을 비추려 한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질문 7로 넘기며, 현재까지 작업 된 이미지를 관통하는 몇 가지 사례를 추려본다.
- 인간 아닌 존재에 인간적 속성을 부여함
- 언어적 은유로 명명된 대상이나 동음이의어를 갖고 있는 대상을 이중으로 접붙임
- 측정할 수 있는 대상을 숫자나 각종 도량형에 맞추어 재구성
-(그림 밖) 더 큰 사건을 드러내기 위해 그림의 주가 되는 대상을 도려냄
-그림의 내부나 외부(제목)에서 텍스트의 개입을 통하여 전형성을 무력화
- 이것들을 일상적 삶의 양태를 본떠 다소 연극적으로 재배치
질문 4 : 어떤 표상을 선별하여 이미지화하는가?
: 낱장 이미지들의 전체적인 연결구조 형성과 형식적 통일성을 부여하기 위해 일정 부분 자기 참조적인 대상 선택을 한다. 발자크의 인간극 시리즈에서 이전 작품에서 등장하던 인물이 다른 작품에 재등장하며 소설책에 적히지 않은 세계에 대해 암시한다. 나는 이를 응용하여 마찬가지로, 한 개의 이미지로 종료되는 세계가 아닌, 메타적 관점에서의 이미지 제작을 통해 부단히 확장되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생성하려 한다. 이를 위해 이전 작업을 종합하여 X, Y, Z축을 설정하고 여기서 추출한 요소를 조합하여 다음 장의 그림을 만든다.
질문 5: 근데 그걸 굳이 귀엽게 그린 이유가 뭔가?
5.1 : ‘귀여워도 소용없어1’이라는 그림의 원래 제목은 ‘강아지풀을 핥는 강아지들’이었다. 처음엔 회사 현관 앞 잡초밭에 피어있는 강아지풀이 그냥 귀여워서 그림으로 옮겼다. 풀만 그리자니 심심해서 다른 요소를 넣었다. 강아지풀이 영어로는 'foxtail'이다. 단어가 막 생성되던 그 오랜 옛날에도, 인종과 언어권을 불문하고 사람들이 그 풀을 보고 다들 그저 귀여운 동물의 꼬리를 생각했다는 것이 천진하게 느껴졌다. 애초에 귀엽게 느낀 대상을 귀엽게 그리는 건 과정상 큰 의문이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그 의문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이 바로 ‘소용없음’을 느꼈던 첫 번째 이유이다.
소용없음 1: 의심 없이 제작된 미끄러운 이미지가 미술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 이 이미지가 키치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세밀한 전제가 필요하다. 예컨대, 작가가 대상의 미끄러움을 숙지하고 작업에 임하였는지, 대상이 그리기 자체를 위한 형식적 탐구의 도구에 불과한 것인지, 혹은 대상을 그리면서 궁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등등.
5.2 : 귀엽지 않은 대상을 귀엽게 그리는 전략에 대해선 약간의 설명이 더 필요하다. 귀엽다는 건 어떤 대상에 가시가 없는 것, 모서리가 없는 것, 완전무결하게 매끈한 것으로 생각한다. 호랑이가 사냥할 땐 무섭지만, 사파리의 비좁은 상자에 들어가 있는 모습을 보면 귀엽다. 그 흉악스러운 외모에서 불현듯 작은 고양이가 연상되기 때문이고, 여기엔 내가 대상으로부터 한없이 안전하다는 전제가 뒷받침 되어있다. 숭고미를 손바닥만 하게 축소해 동그랗게 만들면 귀여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여하튼 이런 의미에서 귀여움이란 관람자에게 더 쉽고 편리하게 다가가기 위한 그리기 전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조금이라도 사람들 마음에 더 쉽게 다가갈 그림을 그리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이러한 방식을 채택하지 않았나 싶다. <질문 2>에도 적어놨다시피, 나는 대상의 어떤 측면을 끄집어내는 ‘화가’의 입장보다는 대상을 대상으로 인식할 수 있게 만드는 ‘번역가’의 입장에 가까운 사람이다. 이것이 정확하게 인식될 수 있다면, 기왕이면 접근하기 편한 이미지로 만드는 게 여러모로 유리할 것으로 판단했다.
소용없음 2: 이 판단이 옳은 선택인지 ‘아직은’ 확신하지 못하겠다. 여기에서 판단이란, 이미지를 생산할 때의 '번역가의 태도'와 내가 선택한 '그리기 방식(형식)' 모두를 포괄한다.
질문 6: 소용없다고 하면서 그리기를 왜 멈추지 못하고 반복하는가
: 나는 그리기를 두 종류로 나누고 있다. 첫째는 말 그대로 종이 위에 안료를 안착시켜 어떤 색감과 형상을 드러내는 것. 두 번째는 한 장의 그림을 한 번의 붓 터치로 가정하는 메타적 관점에서의 그리기이다. 예를 들어, 화가가 임의의 얼룩과 임의의 붓질로 임의의 형태를 만든다. 이 붓질을 점진적으로 가다듬어 보다 더 뚜렷한 형태가 나오는 지점을 모색한다. 최종적으로 임의의 형태가 모든 사람들이 인지할 수 있는 대상으로 전환될 때 이 작업은 끝이 난다. 이 예시에서 화가가 던지는 한 번의 붓질이, 나에게 있어 한 장의 완결된 드로잉이라고 가정한다. 그림이 무의미한 사건으로 종결되지 않기 위한 조치로, 한 장의 드로잉에는 반드시 독립적으로 기능하는 내러티브가 존재해야 한다. 내가 (아직은) 소용없다고 느낀 또 다른 지점도 바로 이쯤이다.
소용 없음 3: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는 것을 확장된 세계라고 주장하기 위해선 합당한 논증(이 경우엔 이미지의 형태와 개수)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현재의 관점에서 내 주장은 일정 부분 비약이라고 볼 수도 있다. 어차피 지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산발적으로 추출된 이미지를 던져보고 그린 그림을 사진 찍어 아카이브 하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는 내가 그린 이미지가 위치하는 곳을 한눈에 조망할 수도 없고 이것들이 조합되어 완성이라 일컬을 수 있는 지점이 어디인지는 더더욱 알지 못한다. 선명한 천체를 관측하기 위해 대기권 바깥으로 우주 망원경을 쏘아 올려야 한다. 지금의 나는 작업을 바꿔보기 위해 노력 중이고, 그 방법의 하나로 일단은 지금까지 작업을 만들 때 가장 즐거웠던 부분을 아예 작업의 전부로 치환해 보기로 했다. 한편으론, 내가 흥미를 느끼던 부분이 사실은 가장 익숙해서 스트레스 받지 않았던 것, 즉 '대기권'과 같은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확신이 없다는 뜻이다. 작업이 좀 더 쌓여봐야 할 거 같다. 그래서 ‘아직은’이라는 부사를 덧붙였다.
소용 없음 4: 따라서 나는 전략적으로, 이미지를 생성하여 보다 많은 ‘붓질’의 사례를 제시하는 것에 집중을 해보려고 한다. 미술에서는 보통 그리기 형식에 대한 논의와 그것에 대한 가치 판단이 우선적으로 고려 되어왔다. 그러나 내 경우엔 이것을 후순위로 두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질문 7: 낱장의 그림들이 엮여 확장된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 조금 극단적인 사례이긴 하지만, 책상 위에서 바지 벗는 시늉을 했던 나훈아의 기자회견이 은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기자 회견은 해당 이슈에 대해 기자들을 모아놓고 해명하거나 시인을 하는 자리이다. 나훈아는 성기 절단 루머에 관해 이야기하던 중, 갑자기 책상을 박차고 올라 바지 지퍼를 살짝 내리고, ‘제가 내려서 5분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아니면 믿으시겠습니까?’라고 되물었다. 다섯 손가락을 쫙 펴고 벨트를 풀고 지퍼를 살짝 내린 채 사람들을 노려보고 서 있는 포즈 하나로, 발아래 빼곡하게 설치된 수많은 언론사의 마이크와 카메라를 제압한다. 일종의 퍼포먼스가 된 이 사건에서 나는, 말하기 위해 설계된 그 장소에서, 말이 아닌 제스처(이미지)로 수많은 눈과 귀를 단박에 잠재울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나는 이 장면을 꽤 여러 번 그렸고, 이 작업의 제목을 ‘나훈아’가 아니라 ‘나훈아 연습’이라고 지었다. (이 시리즈는 여건상 이번에는 전시되지 않는다.)
종말의 날 이후의 세상을 기술하는 아포칼립스라는 장르가 있듯이, 나는 언어라는 기호가 하루아침에 사라진 세계를 상상해 본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대상은 존재하되, 그것들이 엮이는 과정에서 삐걱거리며 온통 비문이 될 수밖에 없는 세상이다. 최초의 언어는 개인 간 소통을 위한 몇 가지 약속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더욱 체계적인 기호가 되고,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만 사고를 할 수 있다. 여기서 이미지는 본질적으로 언어가 없는 세계에 진입하기 위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언어를 통해 이미지를 만들고 그 이미지를 통해 다시 언어적 세계를 무력화하는 전략을 택한다. 이 과정은 무한히 축소되며, 재생산을 통해 다시 확장된다. 비문이 된 개체들은 가장자리에 실금을 남기며 재접합된다.
:언어(시작)-이미지(생산)-언어(파편)-이미지(봉합/재생산)...
(지금까지 적어본 이 질문의 과정들이, 어쩌면 제작되는 족족 표류하고 있는 이미지와 그 내부의 유격에 대한 설명, 혹은 창작 과정 전반에 퍼져있는 뿌연 안개를 헤쳐 나갈 길잡이로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이 글을 적는다. 다소 장황한 건 아닌가 하는 염려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이름이 어쨌든 ‘창작 실험실’이라는 것에 용기를 냈다. 사실 졸업 이후로 작업하는 날보다 쉬는 날이 많았다. 다른 직업을 염두에 두고 살았기 때문에, 그리기 쉬운 그림을 적당히 만들어왔다. 이 전시를 준비하며 나는, 내 작업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곳이 어디일지 처음으로 구체적인 목표 지점을 설정해 봤다. 짧은 준비 기간이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많은 작업을 할 수 있게 되어 기쁘고, 한편으론 사정상 전시하지 못한 그림이 많아 아쉽다. 다음 전시가 언제일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보다는 작업이 구축하는 세계의 윤곽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을거라 믿는다.)
2024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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